24. 사진 일기

2013. 9. 25. 사진 일기 (중국여행 첫째날 상해 항주)

무봉 김도성 2013. 9. 25. 04:08

   

                                                                        홈피 바로 가기 

오늘 날씨 궁금하시지요.

아래 클릭해 보세요.

바로가기

전국        Daum 미디어다음 날씨

 선택지역

 

적지않은 여행비를 아내가 내놓으며 다녀 오라 해

1개월전 중국 여행 관광을 신청해 놓았다.

아내와 함께 하려 했으나 건강에 자신 없는 아내가 사양했다.

아내는 그렇게 장거리 걷고 비행기타는 곳은 싫어했다.

그리고 문인들만 모이는 관광이라 더더욱 싫다해 강권하지 않았다.

 

4쌍의 부부가 모이는 명품 친목회가 있어 자주 여행을 다닌다.

국내관광은 9인승 카니발 승합차 중고를 공동으로 구매 관광하고  공동경비로 관리하고 있다.

아내는 명품친목회 4쌍 친목회원들과 가겠다하여 해외 여행 년1회, 1박 2일 국내 관광은 4회 하고 있다. 

 

어제 저녁 아이들이 용돈을 준비해 들고 왔다.

생각지 않은 용돈이라 고마웠다.

아껴 써야 겠다고 생각했다.

 

새벽 4시 일어나 아내가 챙겨주는 새벽 밥을 먹고 집 앞에서 5시 30분 공항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에 6시 30분경 도착했다.

 

중국문학기행 사진을 아래 날자 별로 클릭하시 볼 수 있습니다.

첫쨋 날 사진보기 블로그   http://blog.daum.net/ybok1004/4457897

두째 날 사진보기 블로그   http://blog.daum.net/ybok1004/4457899 

세째 날 사진보기 블로그  http://blog.daum.net/ybok1004/4457901

네째 날 사진보기 블로그  http://blog.daum.net/ybok1004/4457902

마지막  사진보기 블로그  http://blog.daum.net/ybok1004/4457905

 

 

중국 4박 5일 관광 일정표(2013. 9. 25.-29.)

 

 

 

 

 

 

 

 

 

 아침 7시 인천공항 출국 수속 대기

 

 

 얼굴은 모르지만 한국문인협회우너이라는 큰 그릇 안의 식구라는 믿음으로 우린 반겨 맞아 인사를 나누었다.

 

 

 중국 상해 푸동 공항에 도착해 입국 수속을 마치고 거대한 대륙 중국땅,

생소한 땅과 하늘 공기 낯선 얼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자주 눈길을 가게 했다.

1995년관광 차 처음 방문했던  푸동공항보다 많은 변화와 발전을 했다. 

 

 

 차윤옥 문협 사무처장이 우리 일행 인원을 점검하고 있다.

 

 

 푸동 공항의 하늘

 

 

상해를 행해 달리는 고속도로 차창밖 주변 경관

 

 

 날씨가 구름으로 흐렸으나 관광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도심 깊숙히 파고 든 바닷물이 우리들 마음처럼 출렁거렸다.

 

 

 고속도로 주변 농촌 가옥들이 17년전 방문했을 때 보다 발은 변모를 했다.

 

 

 우린 첫날 처음으로 중국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위해 환영 식당 현판을 바라보며 식당에 들어 갔다.

 

  

 음식이 나오기 전 서로 쑥스럽고 어색한 얼굴로 서먹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식탁에 앉아 있다.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대화로 얼굴이 낯선 사람들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꺾어 생소한 풍경에 길을 드리고 있다.

 

 

서로 서먹한 모습은 남자나 여자나 같은것 같다.

이제 음식이 나오고 술잔으로 건배가 시작되면 그방 친구가 될것이다.

 

 

관광객을 맞이하는 전문 식당으로 대형 식당에는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녹차로 음식이 들어 갈 밥길을 다듬고 느끼한 중국 음식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시원한 중국 맥주에 서로의 우정을 담아 마시며 여행의 흥분과 설렘으로 어색한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우리 음식 중에 대표적인 반찬 배추 김치에 자주 젓가락이 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우리 속담이 생각났다.

 

 

아직 이름도 모르지만 맥주를 마시고 음식을 나누는 가운데 서로 궁금한 정보를 하나하나 풀어 갔다.

정년후 새롭게 접하게 된 문학세계의 햇병아리인 나는 나이는 좀 많은 것 같으나 모든 것이 조심스러왔다.  

 

 

식당 현판

 

 

식당 건물 현관

 

 

같은 지역 용인에서 왔으나 서로 몰랐는데 오늘 처음 알게된 나의 소개로 첫인사를 나누고 식당 현관에서  기념 사진을 남겻다.

최진연 시인(목사)과 김숙려 시인

 

 

항주로 가는 고속도로변 농촌풍경으로 전주가 보이지 않았다.

각 가정 지붕에 태양열 발전기를 설치해 놓았다.

 

 

밭과 농촌 가옥 풍경

 

 

항주로 가던 고속도로 휴게소 장안

 

 

항주 시내 안경 가게

 

 

 소동파 석상 앞에서

좌/ 앞줄- 김운중 김문선 백덕순 이지연

      중간 - 김기원 이옥진 강성룡 김숙려 조재화 정종명 이명숙 김새록 최진연 김송배 전경애

      뒷줄 - 차윤옥 박종현 황정자 김희선 김연선

      사진사 - 서상만 김용복

여행단 인원 22명

 

 항주 소동파 기념관

 

 

소동파 기념관 앞 수령을 알 수 없는 나무형상에 눈길을 끌었다.

 

 

동파육은 절강성 항주시의 전통적인 명요리인데  근 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요리는 삼겹살고기를 좋은 걸로 골라서 물을 넣지 않고 대신 소흥의 명주를 넣고 사기로 만든 솥안에 넣고 덮개를 꼭 덮은 다음 약한 불로 오래오래 끓여서 만든 것이다.이 고기는 붉은 색갈이 나고 그 즙맛이 아주 좋으며 고기는 바삭바삭하면서도 아주 잘 익었지만 흩어지지 않고 먹을 때 입이 거뿐하면서도 맛이 아주 좋다.

 

  기재에 의하면 이 요리는 북송 때 소동파가 창제한 것으로하여 동파육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소동파는 호북 황주에 살 때 시가의 형식으로 고기를 삶는 노래를 지었다:

 

   "황주의 질 좋은 돼지고기는 아주 싼값이지만    

잘사는 사람은 먹으려 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은 삶지 못하네.  

물을 적게 넣고 약한 불로 삶으면 다 익은 다음 스스로 제맛이 나누나."     

 

동파육은 이 방법으로 만든것이다.    

 

  송 원우 4년 즉 1089년 소동파가 항주지부로 있을 때 백성들을 조직하여 서호를 소통시키게 되었는데 시공이 끝났을 때  소동파는 돼지고기와 소흥술로 졸인 고기를 호수를 판 백성들에게 주며 그들을 위문하였다. 그러므로 돼지고기와 소흥술을 주요원료로 하고 소동파의 요리법으로 졸여서 만든 이 요리는 맛이 아주 좋아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후에 이 요리는 민간에서 전해져 내려왔는데 <동파육>이라 불렀다. 이 고기는 오늘까지 전해내려 와 <동파육>이란 아름다운 요리이름은 중국의 남방과 북방에 널리 알려졌다. 

 

 

 

 

소동파 기념과 내의 풍경화

 

 

역대 소동파 시인과 같은 시인의 꿈을 그리며 시인 최진연 목사님

 

 

 

서호의 아름다운 풍경을 영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소동파 [Ssu Tungp'o, 蘇東坡]

중국 송 [宋] 시인·산문작가·예술가  

태어난 때 1036. 12. 19
죽은 때 1101. 7. 28.
소속 국가 중국
소속 국가 부속정보 송(宋)
직업 시인·산문작가·예술가
( 1036. 12. 19~ 1101. 7. 28 ).

중국 북송시대의 시인·산문작가·예술가·정치가.

 

본명은 소식(蘇軾), 자는 자첨(子瞻).

동파는 그의 호로 동파거사(東坡居士)에서 따온 별칭이다.

아버지 소순 (蘇洵), 동생 소철 (蘇轍)과 함께 '3소'(三蘇)라고 일컬어지며,

이들은 모두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

 

소동파는 북송 인종(仁宗) 때 메이산[眉山:지금의 쓰촨 성(四川省)에 있음]

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메이산의 도인(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도가(道家), 특히 장자(莊子)의

제물철학(齊物哲學)을 접하게 되었다.

1056년 그의 아버지 소순은 두 형제를 데리고 상경하여 이들의 시를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고 격찬을 받았다.

이들 형제는 그해 가을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나란히 급제했지만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1060년 복상(服喪)을 마치고 수도인 카이펑[開封]으로 돌아온 소동파는

관리임용 특별시험인 제과(制科)에 동생과 함께 급제했다.

이어 봉상부(鳳翔府:지금의 산시 성[陝西省]에 있음)의 첨서판관(簽書判官)이

되어 수도에 남게 된 동생과 헤어져 임지로 떠났다.

 

봉상부는 서주(西周) 이래의 여러 문화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는 孔子墓의 석고(石鼓:고대문자를 새긴 10개의 북 모양의 돌)

카이위안 사[開元寺] 동탑(東塔)에 남아 있는 당대 왕유(王維)·오도현(吳道玄)의 불화(佛畵) 등을 접한 감회를 〈봉상팔관 鳳翔八觀〉에서 읊었다.

봉상부鳳翔府에서의 임기가 끝나 상경한 1065년에 부인 왕씨(王氏)와 사별하고

그녀의 생전 모습을 〈망처왕씨묘지명 亡妻王氏墓地銘〉에 담았다.

이듬해 아버지 소순마저 죽자 아버지의 관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喪을 치렀다. 탈상(脫喪)하고 상경한 1068년은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로,

참지정사(參知政事:부재상)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가

중앙정부의 물자조달을 합리화하기 위한 균륜법(均輪法),

농촌에 저리자금을 융통하여 빈농을 보호하려는 청묘법(靑苗法) 등

이른바 신법新法을 시행하던 시기였다.

신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소동파는 감관고원(監官告院)이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업무를 담당하다가 지방 근무를 청하여 저장 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근무했고, 이어 밀주(密州: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음)·

쉬저우[徐州]·후저우[湖州] 등지의 지방관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新法으로 인해 고생하는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써 묘사하고는 했다. 후저우 지사(知事)로 있던 1079년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御史臺)에 체포되어 수도로 호송되었다.

이때 어사들의 심문과 소동파의 변명을 담은 기록이 〈오대시안 烏臺詩案〉에

남겨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다행히 사형을 면한 그는 100일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황주(黃州: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 황강 현[黃岡縣]) 단련부사(團練副使)로 좌천되었다.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황주에 거주할 의무가 지워진 일종의

유형(流刑)이었다.

황주에서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부인은 양잠을 했고, 그는 본래 병영이었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이 땅을 동파(동쪽 언덕)라 이름짓고 스스로를 동파居士라고 칭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그 유명한 〈적벽부 赤壁賦〉가 지어진 것도 이곳에서였다.

 

1085년 신종이 죽고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신종의 어머니이며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황후(宣仁太皇后)가 섭정을 시작했다.

그녀는 뤄양[洛陽]에 운둔해 있던 사마광(司馬光)을 불러들여 왕안석

일파가 만든 신법들을 폐지했다.

이때 소동파도 다시 발탁되어 예부랑중(禮部郞中)을 시작으로 중서사인

(中書舍人)·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知制誥) 등의 요직에 올랐다.

그러나 사마광의 신법 폐지가 모역법(募役法)의 폐지에 이르는 등 과격해지자,

소동파는 중서사인이 되어 수도로 올라온 동생과 함께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사마광이 죽고난 후 당쟁이 시작되었고, 선인황태후마저 사망하자 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철종은 신법들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소동파는 다시 좌천되어 혜주사마

(惠州司馬)로 임명되었다.

그에 대한 탄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를 질시하는 정치인들로 인해 하이난 섬[海南島]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주로 거주하던 리족[黎族]과 함께 비참한 생활을 했다.

철종의 죽음으로 휘종(徽宗)이 즉위하면서 제거옥국관(提擧玉局觀)이라는

명예직에 봉해져 上京하던 도중, 큰 병을 얻어 창저우[常州]에서

66세의 생을 마감했다.

 

소동파는 구양수·매요신(梅堯臣) 등에 의해서 기틀이 마련된 송시(宋詩)를

더욱 발전시켰다.

구양수·매요신 이전의 시가 대개 비애(悲哀)를 주제로 해왔던 데 비해서

이 두 사람은 평안하고 고요한 심정을 주로 읊었고, 소동파는 이에서 벗어나

훨씬 적극적·자각적인 관점을 취했다.

즉 인생체험에 대한 시각의 전환을 생활의 지혜로 삼아 인간 불행의

內面에서 자신만이 인식할 수 있는 행복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가 이처럼 비애의 지양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장자의 제물철학,

불교의 묘리(妙理) 등의 사상적 배경 때문이었으며 〈적벽부〉에는

이같은 그의 사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의 시는 자유분방한 심정과 재능의 표현을 통해 경쾌한 리듬 속에

절묘한 비유와 유머를 담고 있다.

제재에 있어서도 특별히 구애받지 않아 이전까지 다른 사람들이 취하지

않았던 것, 간과되어왔던 것들도 시로 썼다.

그의 시는 모든 사람에 대한 폭넓은 애정을 기저에 깔고 있으며,

인간의 욕망을 긍정했고 인간의 선의(善意)를 신봉했다.

그는 사(詞)에서도 기존의 완약(婉約) 대신에 호방한 사풍을 창시했다.

'적벽회고'(赤壁懷古)라는 부제가 붙은 〈염노교 念奴嬌〉·〈수룡음 水龍吟〉

등은 영물시(詠物詩)의 극치라 일컬어진다.

 

한편 산문에서는 당송8대가 중 소씨 부자, 즉 3소가 포함되었다.

동파의 산문은 송대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이색적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분방함이다.

동파는 작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와야만 훌륭한 문장이 된다는

청년기의 생각을 평생토록 일관했다.

〈조주한문공묘비 潮州韓文公廟碑〉 등의 비문, 〈유후론 留侯論〉·

〈범증론 范增論〉 등의 사론(史論)을 비롯해 많은 산문을 남겨

지금까지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

 

소동파는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글씨는 동진(東晋)의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의 정통적인

書法과 당대 안진경(顔眞卿) 일파의 혁신적 서법을 겸비하고 있는데,

그 자신은 글씨 자체보다도 살아 있는 정신과 기백의 표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그는 〈제발 題跋〉이라는 평론에서 해서(楷書)가 모든 서체의 기본이며

서예는 사람 됨됨이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의 글씨로는 유배지 황주에서 쓴 〈한식시권 寒食詩卷〉, 예부상서 시절에

쓴 〈이태백선시권 李太白選詩卷〉 등이 원본으로 남아 있다.

항저우에서 쓴 〈진규각비 宸奎閣碑〉와 같이 탁본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으나, 모두 신품(神品)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필적을 모은 〈서루첩 西樓帖〉도 전해진다.

한편 그의 죽화(竹畵)는 문동(文同)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동파는 그림을 그리는 데 기교를 쓰지 않았으며, 친구들은 그러한 그의 그림에

한 점의 세속성도 보이지 않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왕유의 그림에 대해 "시 속에 그림 있고 그림 속에 시 있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이후 중국 화론사에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이같은 예술 사상과 기교에 대한 무관심은 문인화(文人畵)를 크게 부흥시키는

힘이 되었다.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동파의 시문집은 생전에 이미 간행되어 재판의

물증으로 제출될 정도였다.

〈동파집 東坡集〉 40권과 〈동파후집 東坡後集〉 20권은 南宋代 의 판본이

여러 종류 남아 있다.

이 두 책에 〈주의 奏議〉·〈내제집 內制集〉·〈외제집 外制集〉·

〈응소집 應詔集〉·〈속집 續集〉을 합친 〈동파칠집 東坡七集〉은

100권이 넘으며, 〈동파전집 東坡全集〉이라 불리기도 한다.

 

- 인터넷 검색 자료 -

 

현지 가이드 최영란씨의 안내로 서호관광을 위해 유람선 선창으로 이동하고 있다.

 

 

유람선 선착장

 

 

서호

 

서호는 항주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유명한 미인 서시(西施)를 기념하는 의미로 '서자호(西子湖)'라고도 불린다. 서시에 대해서는 실제 인물인지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로는 월나라 왕인 구천(勾踐)이 오나라의 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던 인물로, 결국은 구천의 계략대로 오나라왕 부차가 서시의 미모에 빠져 나라일을 돌보지 않게 되었고, 오나라가 멸망에 이르게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상 양귀비 등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미인으로 꼽힌다. 서호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호수에는 소영주, 호심정, 완공돈 등 3개의 섬이 떠있다. 호수의 총 면적은 60.8㎢이며, 그 중 수역의 면적은 5.66㎢이다.

서호는 안개가 끼었을 때나, 달 밝은 밤 또는 일출 때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서호 안과 근처에 위치한 유명한 명소 10가지를 서호 10경(西湖 10景)이라 부르는데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단교잔설(斷橋殘雪), 평호추월(平湖秋月), 소제춘요(蘇堤春曜), 곡원풍하(曲院風荷), 화항관어(花港觀魚)등 이다. 단교잔설은 중국의 오래된 신화고사인 백사전(白蛇傳)에서 백소정과 허선이 만난 무대가 된 곳으로 옛날에는 다리 중간에 문이 서있었다고 한다.

문 위에는 처마가 얹혀있었는데 눈이내리면 눈이 처마위로 쌓여 멀리서 바라보면 눈 쌓인 다리가 문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것 같이 보여 단교(斷橋)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평호추월은 넓이 400평방미터의 정원으로 호수 수면과 높이가 같아 평호(平湖)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소제춘요는 소동파가 항주에 지사로 부임했을때 쌓은 둑(제방)으로 사시사철 모두 아름답지만 이름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 봄날 새벽의 경치가 가장 절경이다.

곡원풍하는 소제춘요의 북서에 펼쳐진 풍경으로 여름에 연꽃이 피어 특히 아름답다.
화항관어는 봄에 모란꽃을 보며 용정차를 마실 수 있는 운치있는 공원으로 누각 등이 세워져 있으며 수많은 모란이 피어있는 목단원(牧丹園)이 유명하다.

 

유람선 내의 김연선시인 서상만시인 정종명 이사장

 

 

서호 관광 유람선 선상에서 무봉 김용복 시인

 

 

깊은 상념속의 백덕순 시인

 

 

서호의 주변 경관

 

 

 

 

 

서호 유람선 관광을 마치고

 

 

 

 

 

 

화항관어(花港觀漁) - 서호 십대경 중의 하나

용정차 시음장

 

용정은 유명한 용정차의 명산지이다. 서부 서산 봉황령(鳳凰領)에 위치해 있으며, 서호 풍경구 3대 샘물 중의 한 곳이다. 샘물은 암석 틈 사이에서 나와서 맑고 깨끗하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용정의 물이 깨끗하여서 이 물로 용정차를 끓이면 그 향기과 맛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한다. 또한 수면 위에서 움직이는 분수령을 발견할 수도 있다.

 

 

용정은 유명한 용정차의 명산지이다. 서부 서산 봉황령(鳳凰領)에 위치해 있으며, 서호 풍경구 3대 샘물 중의 한 곳이다. 샘물은 암석 틈 사이에서 나와서 맑고 깨끗하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용정의 물이 깨끗하여서 이 물로 용정차를 끓이면 그 향기과 맛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한다. 또한 수면 위에서 움직이는 분수령을 발견할 수도 있다.

 

용정차 시음장 현관 차의 조상 기념관

 

 

용정차 시음을 위해

 

 

용정의 유명한 보이차와 녹차를 시음하기 위해

 

 

용정차 설명회장

 

 

 

용정차 시음으로 피로를 잠시 풀고 잇다.

 

 

 

 

백덕순 시인과  최진연 시인

 

 

항주의 유명한 명소 소동파 기념관 관광과 유람선 서호관광 차로 유명한 용정의 녹차를 시음한 후

동파육 요리로 유명한 식당에서 저녁 식사에 앞서 정종명 이사장의 건배를 하고 있다.

 

 

잔을 높이 들어 오늘의 즐거운 관광과 내일의 안전여행을 다짐하며 건배를 하고 있다.

 

 

유명한 천년의 요리 동파육을 타국 중국에서 맛을 보며 건배에 건배를 했다.

 

 

시원한 맥주와 53%의 고량주가 우리의 몸을 흔들었다.

 

 

"세상은 큰 잔치집 같아도 어느속에선가 늘 울고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이상국 시인의 -국수가 먹고싶다-는 시를 생각하며 남김 없이 알뜰하게 음식을 먹으며 감사했다.

 

 

관광 첫날 저녁식사를 먹으며 서로 어색하고 서먹한 마음들을 털어내고 가족처럼 정을 나누고 쌓았다.

 

 

늘고 기운 없어 다리가 떨리면 여행을 못다닌다고 가슴 떨리는 설렘으로 건강할 때 여행 다니라는 말을 직접 체험했다.

한편 건강치 못한 아내와 함께 오지 못한 아쉬움이 한숨이 되어 낼 숨에서 피리소리가 났다.

 

 

저녁도 든든히 먹었겠다 약간의 취기가 가슴을 뛰게하는 설렘 속에 궁금한 것들을

묻고 대답하며 가슴에 하나하나 믿음으로 우정을 채웠다.

 

 

송성의 유명한 가무쇼를 보기 위해 걷고 걸었다.

 

 

 

송성의 유명한 홍보탑

 

 

송성의 대형 극장

 

 

가무쇼 관람전에 기념 촬영

 

 

경쾌한 걸음속에 회춘의 봄이 보인다.

 

 

송성 가무극장 경내

 

 

 

극장 거리 야경

 

 

명필 명각에 발길을 멈추게 했다.

 

 

수천명이 관람할 수 있는 극장 내부와 무대에 감탄했다.

 

 

실제로 비도 내리고 바람도 불고 눈이 내리고 낙화가 날린다.

 

 

생전 처음 보는 장엄한 효과 음과 생동하는 무대가 우리를 흥분으로 몰아 갔다.

 

 

고대 황실 가무단 같은 배우들을 바라보며 황제가 된 기분이다.

 

 

배우들 하나하나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것 같이 아름답다.

 

 

출연하는 배우도 인원에서 최고요, 무대의 크기나 장엄 음악이 가슴판을 셀렘으로 요동치게 했다.

 

 

관람객 모두가 환호하고 잊지 못할 추억으로 사진에 담아 내고 있다.

 

 

무대가 전면을 중심으로 좌면 우면 후면 그리고 하늘 5면에서 예측을 할 수 없이 전개 되었다.

 

 

실제와 똑같은 강물이 되어 무대에 흐르고 무대가 불로 활활 타 오르고 갑옷을 입은 장군이 실제로 말을 타고 달렸다.

 

 

출연진들이 관람객에게 환송의 춤과 음악으로 인사를 했다.

평생에 다시 보지 못할 황홀한 가무쇼를 바라보며 함께 하지 못한 아내의 동행이 후회가 된다.

늦은 밤 숙소에 돌아와 룸메이트 김기원 시인을 처음 인사하고 첫날 밤을 보냈다.

나이가 나보다 적은 그였지만 나를 형님이라 따뜻한 호칭에 나는 아우님 하며 포옹으로 답례했다. 

 

 

 

 

 

멋지게 사는 거다

 

 

 

죽음에 직면하고 나자

나는 오히려 삶을 향한 갈망을 느끼게 됐다.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나는 삶을 멋지게 살기를

갈구했다. 죽지 않고 살기로 했으면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게 백번 낫지 않은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내가 원망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인생이란

그저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이니까.

태어났으면, 멋지게 사는 거다.

 

 

 

- 류웨이의《죽거나, 멋지게 살거나》중에서 -

 


 

 

 

//

 
    어둠의 노래 잠 못 들어 화려한 밤을 아는가? 어둠 속에서 나를 어둠에 길들이고 있을 때, 푸른 비늘을 털고 수런수런 일어서는 새벽 창을 아는가? 새벽은 빛살 무늬 상형문자 그대가 나에게 써 보낸 편지. 어둠은 해면처럼 끈끈하다, 어둠은 뻘밭처럼 집요하다. 어둠은 동굴처럼 은근하다, 어둠은 길고 깊은 자유. 어둠은 나의 곳간, 어둠은 나의 쉼표, 어둠은 나의 태초, 아, 어둠은 내 질병과 회생의 굴헝, 칠색 영롱한 내 은둔의 꽃밭이다. 꿈으로 가는 기차를 타듯 미망에 타오르는 눈을 감고서 나 드디어 떠나도 좋은지. 어둠의 문설주에 기대어 기적소리가 울리기를 기다린다. 나는 어둠에 실려서 간다. 나는 어둠의 수레를 굴리며 간다. 어둠은 실오라기처럼 내 육신을 감고 나 쓸쓸히 고개 숙여 경청하노니, 아름답다, 어둠의 유순한 숨소리. 열 두 고개 향내나는 여우굴 지나 큰 바닷길 가파른 돌벼랑 지나 바람 잔 다북쑥 야트막한 언덕까지 물푸레나무 머리 빗는 강나루까지 밤으로의 종착역이 신기루처럼 멀어져도 나는 좀처럼 지치지 않는다. 나는 밤마다 어둠을 삽질한다. 새벽은 나의 어깨에 얼굴을 문지르고 나는 청보석 같은 별 하나에 눈을 맞춘다. 그대 바라볼 창을 뚫는 것이다. 잠 못 들어 화려한 밤을 아는가? 걸어 둔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북치는 마을의 환호와 같고 천정에 얼룩지는 박쥐 그림자도 일제히 일어나서 갈채하는 밤 내 안에 불 켜지는 거대한 궁성의 그 비밀한 장소를 아는가? 詩/이향아

          http://cafe.daum.net/sogoodpo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