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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경기 수원시 장안구(현재접속지역) 읍·면
오늘 아침도 평소처럼 5시 잠을 깼다.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허루를 시작했다.
코로나19 전염병 여파가 우리나라도 확산하는 형편으로 걱정이다.
가능한 외출을 금지하고 집에서 지내는 것이 최선인것 같다.
간밤부터 봄비가 줄기 차게 내렸다.
오늘은 9시에 청소도우미 아주머니가 오고 10시에 요양 보호사가 오는 날이다.
어제 밤에 끓려 놓은 육수로 콩나물 국을 끓여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비가 오지만 집에 있을 수가 없어 8시경 테니스 코트에 나갔다.
마침 한동수교장이 나와 있어 커피를 마시며 코로나 정치 신천지 교회 기타 종교에 대한
폭넓은 대화를 했다.
9시경 한 동수 교장은 떠나고 나혼자 라카에 남아있었다
.
양철지붕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나를 어린 고향으로 불러 갔다.
아무도 오지 않는 테니스코트 라카룸에 앉아 봄비소리를 듣는다.
양철지붕 낙수소리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다.
어머니가 뒤집은 솥뚜껑에 참기를 넣어 지글 소리처럼 따다다 다다따다 듣기가 좋다.
어머니 콧노래속에 녹두전 뒤집는 손과 누렇게 익은 전이 식욕을 돋운다.
한편 비가 갑자기 쏟아지는 여름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물에 빠진 생쥐처럼 들녁을 헤맸던 날도 그려 졌다.
그 날 젖은 옷을 말리려고 찾아든 물레방앗간 짚불피우고 그녀의 옷벗은 상의에 걸친 붉은 브래지어끈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몸은 늙어 지금 여기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실록이 우거진 푸른 나무처럼 봄비에 촉촉히 젖어든다.
시간을 보니 10시가 넘어 집으로 가는 길에 우리 은행에 들렸다.
통장이 페이지가 넘쳐 새로 개설하고 통장 정리도 했다.
11시경 집에 들렸다.
밖에 비가 내려 요양보호사도 아내도 청소도우미 아주머니도 모두 집에 있어 복잡했다.
나는 방에서 습작시에 몰두 했다.
뉴ㅡ스에 코로나 상황을 들어 보니 천명에 가까운 확진자에 사망이 11명으로 심각하다.
서울대 병원 신경과 예약을 취소 하려 수차례 전화를 했으나 불통이다.
오후 피곤하여 낮잠을 잤다.
저녁 6시 아내와 식사후 아파트 산책으로 하루를 마감 한다.
빗소리
김도성
오랜만에 듣는 양철지붕 빗소리
홀로 듣는 소리에 어머니가 보인다
뒤집은 무쇠솥뚜껑에 녹두 전 부치는
소리처럼 따다닥 다다닥 귀가 즐겁다
누렇게 부쳐진 녹두전 어머니 얼굴
전에 맛 간장 듬뿍 찍어 입에 넣는다
봄비 맞는 가지가 푸른 잎 내밀듯
혀끝으로 입술 돌려 입맛 다신다
어느새 커다란 나무처럼 늙어 버린 몸
봄을 기다리는 아이로 꽃밭을 달린다
2020. 2. 25.
이런 영도자를 원한다
위대한 지도자는 일반 사람과 달리 앞을 내다보고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과 판단이 달라야 한다.
수학여행 버스 8대가 말티고개를 넘고 있다.
하행하는 험한 고갯길을 1호에서 8호차가 내려가고 있다.
그런 8호차가 고개 정상에서 급정거를 한다.
마지막 내려가는 버스가 구르면 7대 차량과 충돌해 대형 사고가 날 판이다.
나는 8호차 인솔 책임 기사가 브레이크를 밟고 진땀을 흘린다.
기사 쪽 앞바퀴는 가드레일에 걸치고 오른쪽 바퀴는 공중에서 회전한다.
아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앞 문 쪽으로 오려한다.
"얏! 꼼짝 마! 자리에 앉아 있어."
나는 큰 소리로 불호령을 한다.
망치로 뒷 창문을 깨고 학생들 하나하나 하차시켜 사고를 면한다.
세월 호 참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얏! 바다로 모두 뛰어라.’
누군가가 했다면 희생은 줄었을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발생은 일종의 전쟁이다.
즉시 중국인 출입 금지하고 국내 모든 집회 금지 조치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자국민 보호를 위해 계엄령에 준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그래서 위대한 지도자를 領導者라 한다.
◆2020/02/25(화) 대한민국이 가야할 길 2 (6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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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가야할 길 2 우리나라 역사에 처음 공화정치가 시작이 되고나서 2년도 채 되기 전에 소련의 지령을 받은 김일성은 소련군이 떠나면서 마련해준 탱크와 비행기와 대포를 인수하고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위해 남침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소련군이 이미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남조선을 침략할 군사적 장비를 다 마련해주고 떠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그자들의 뜻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한반도 철수를 결정한 것이었다. 그 당시 주한 미대사 무치오는 장담하였다. “미군도 철수합니다. 그러나 인민군의 남침은 없을 겁니다.” 그 한마디가 한반도를 전쟁으로 몰고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군이 철수하였을 때 국군은 북의 남침을 막을만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불과 3일 만에 서울은 김일성에게 짓밟혔고 인민군은 일주일이면 부산까지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다. 서울을 사수하겠다던 이승만 대통령의 약속은 허무한 약속이 되었고 미처 피난가지 못한 대한민국의 선남선녀들이 김일성 치하에서 죽을 고생을 하였다. 고생만 한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도 많다. 어쩌면 우리 역사 오천 년에 가장 비극적인 90일이었을지도 모른다. 9.28수복으로 서울은 되찾았지만 남한의 상당 부분이 인민군 수중에 있었다. 그런 일들을 경험하면서 오늘까지 나는 살아남았다. 김동길 Kimdonggil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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