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작시 원고

국기경례

무봉 김도성 2018. 6. 6. 13:08



현충일인 지난해 6월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옥인동 군인아파트에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사진=이기범 기자


오늘은 현충일 태극기 게양으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게 삼가 명복을 빕니다.

8년전 동아일보에 올린 기사를 현충일에 다시 올려 봅니다.


[나와 6·25] 마을에 걸린 인공기를 발기발기 찢고 국군에 "들어오라" 신호보낸 주지스님
나와 6.25 조선일보 기사
2010. 4. 23. 조선일보 6면

▲ 김도성(70·경기도 수원시) 내 고향은 충남 서산시 고북면. 유엔군이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되찾은 직후 우리 마을에도 국군이 북한군 잔당을 소탕하러 진격해 왔다. 하지만 국군 탱크는 면 소재지 남쪽 언덕에 머무른 채 공포(空砲)만 쏘아대고 있었다. 마을에 인공기가 걸려 있는 탓에 아직 북한군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워 섣불리 내려오지 못한 것이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9월 30일이었던 것 같다. 새벽녘에 "팡"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밖에 나가보니 6척 장신(長身)의 스님 한 분이 오른손에 사제(私製) 권총을 들고 늠름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인근 고찰(古刹)인 연암산 천장암(天藏庵)의 주지였다. 스님은 면사무소에 걸린 북한 면당위원회 간판을 주먹으로 일격(一擊)해서 떼어낸 후 우물에 처박아버렸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영웅호걸의 무공을 보는 듯했다. 이어 스님은 바로 옆 주재소(경찰지서) 국기게양대에 걸린 인공기를 내려 발기발기 찢어버린 뒤 허리춤에서 태극기를 꺼내 최대한 높게 게양했다. '신호'가 올라가자 그제야 국군 탱크는 마을로 내려왔다.

국군을 본 마을 사람들은 통곡을 했다. "하루만 먼저 오지 그랬소. 그러면 우리 아들이, 우리 남편이 죽지 않았을 텐데…."

바로 전날 밤 북한군은 임시 감옥으로 사용하던 소방대 창고에 불을 질러 가둬두었던 공무원과 지주(地主)들을 죽였다. 태극기가 하루만 더 일찍 올라갔더라도 여러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스님에게 왜 그런 활약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소방대 창고에서 죽어가는 사람 목숨을 하나라도 더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다들 생각했다. 커서 교사가 된 나는 학생들에게 스님과 태극기 이야기를 수십년간 해왔다. 60년이 지났지만 스님의 통쾌한 몸동작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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