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사진 일기

2018. 5. 15. 사진 일기(스승의 날, 경기대학교 시창작 수강)

무봉 김도성 2018. 5. 15.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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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테니스대회 호주 오픈 바브리카 우승 장면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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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7. 15. 김용복 이준찬/장대원 박승혜 테니스 경기 동영상

http://tvpot.daum.net/v/v5b08ff7BiwuOBEnjfnmijm

어제는 수원문인협회 박병두회장인 주관하는 스승의 날 저녁 초대에 참석했다.

각자 자기가 살아온 교직에 대한 회고를 담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조촐한 저녁식사와 반주를 한후 해산했다.

2차로 박회장님에 대한 답례로 치맥자리를 내가 마련했다.

그러다 보니 체력에 맞지 않게 과음을 했다.

오늘 아침에 조금 늦잠을 자게 되어 아침 식사 준비에 시간이 없어 애를 먹었다.

이른 아침을 챙겨먹고 테니스 코트에 나가며 아내 밥상을 차려 놓았다.

젊은 회원들과 타이트하게 테니스 경기후 땀으로 젖은 몸을 샤워 했다.

집에오자 마자 옷을 갈아 입고 경기대학교 시창작 수강하러 갔다.

오늘은 스승의날 교수님에게 축하 꽃과 기념품을 선물했다.

그리고 광교 백운 농장식당에서 점식사후 김동찬교수님이 마련한 차를 마시고 집에 왔다.

차값이 7천원 밥 한끼 값과 맞먹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저녁을 먹고 나서 아내가 밥맛이 없다며 내일은 외식을 하자고 투정을 했다.

무엇을 먹고 싶으냐 물으니 뭐가 맛이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 짜증을 낼때는 속이 상한다.

저녁식사후 귀찮고 짜증 스럽지만 아파트 산책을 했다.

이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삶이 버겁다.































2018/05/15(화) 내 꿈은 여기서 좌절되는가? (15)

 

나는 남녀 학생이 30명쯤 되는 3학년 담임선생이 되었는데, 그 반에 체격도 좋고 잘 생긴 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 학생에게 “네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더니 이 학생의 나이가 나와 똑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둘이 다 1928년 출생, 18살 학생과 18살 선생의 맞대결, 그러나 신분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다. 그 학생은 영유골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벌써 장가를 들어 애 아버지가 되었다는 말도 들었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그는 스승인 나에게는 매우 고분고분한 학생이었다.

3학년은 한 반 뿐이었는데, 본 교사에는 교실이 부족하여 거기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이화정이라는 건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얼마 뒤에 어머니가 내 여동생 옥영이를 다리고 오셔서 잘사는 집 방 한 칸을 얻어 살림을 해주시면서 학교 선생님인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셨다. 학교에서 다달이 받는 월급봉투로 생활은 해나갈 수 있었다.

아버님은 여전히 멀리 계셨고, 어머니는 이제 하나 남은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 하셨다. 2. 3 년 뒤에는 나도 군대에 가야하는데 시골에서 선생노릇 하다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인가 하는 적막한 생각이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때도 있었다.

김동길
Kimdonggill.com


 

 

 

 

 

 

 

아름다운 용서

김도성

 

싱그러운 오월 연초록 나뭇잎 피어나는 숲길을 걷노라면

설레는 가슴으로 교직을 시작했던 총각 교사 시절이 생각난다.

 

내일이 스승의 날이다.

37년 동안 외길 걸어온 교직을 정년한지도 벌써 15년이 되었다.

참으로 세월이 살 같다는 말을 실감한다.

살아 온 길을 되돌아보니 후회되는 일과 보람된 일들이 흑백 영상처럼 스쳐간다.

10년 전 오월 스승의 날 50대 중년의 사업가 사장이

교육청 은사 찾아주기 인터넷을 통해 연락처를 알아 찾아 왔다.

 

66년 대전에 모 중학교 다니던 제자 김 석훈(가명)입니다.

단둘이 만난 식당에서 큰절을 올리며 인사를 했다.

4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자세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생각이 났다.

혹 자네 고향이 금산군 추부면이 아닌가?” 물었다.

! 선생님 맞습니다.”

저를 기억 하시는 군요.”

이렇게 찾아 주어 반갑네.”

선생님 이제야 찾아 온 것을 용서해 주세요.” 무릎을 꿇고 술잔을 올렸다.

그리고 나는 단숨에 마신 뒤 잔에 술을 딸아 주었다.

 

김 군이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총각교사로 기숙사에서 숙식하는 관계로

남자 사감이었다. 김 군은 늦게 학교를 다녀 나이가 많았다.

기독교 학교로 전교생 3학급 남녀 130여 명 교사 10여 명 되는

대전 변두리 작은 학교였다. 기숙사생이 남녀 30여명으로 기억한다.

김 군도 기숙사생이었다.

기숙사생들은 주로 방학이나 주말에 집으로 갈 수 있었다.

 

5월 중간고사가 끝난 주말로 기억된다.

남학생 3명 여학생 5명만이 기숙사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일요일 아침 여자사감 선생님이 세면장에 벗어놓은

시계를 잃어 버렸다.

당시만 해도 시계가 비싸 시계를 차고 다니는 학생이 없었다.

 

나는 학생들을 모두 모아 놓고 시계를 가져간 학생은

선생님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갖다 놓으라고 했다.

그리고 일요일 외출했다가 오후에 기숙사에 들어 온 나는

교무실과 교실을 돌아보았다.

나의 책상 서랍에 종이에 싸인 시계가 있었다. 시계 포장지가 생물 노트였다.

노트 필적을 조사해 본 결과 이 영훈(가명)군의 노트였다.

김 군은 이 군과 같은 방을 썼다.

나는 직감에 김 군의 소행으로 짐작했다.

시계를 갖다놓은 것은 다행이라 생각했으나

친구에게 누명을 씌운 행위를 용서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김 군을 저녁 식사 후 기숙사 뒷산으로 불렀다.

네가 시계를 갖다 놓았지.”

다그쳤다.

안했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딱 잡아떼었다.

화가 난 나는 종아리를 쳤다.

비겁한 놈아 친구에게 누명을 씌워.”

호통을 쳤다.

극구 부인하던 김 군이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빌었다.

나는 김 군을 끓어 안고 시계를 탐한 것도 나쁘지만

친구에 누명을 씌운 것이 더 나쁜 짓임을 타 일었다.

김 군도 울고 나도 울었다.

결국 김 군은 자책감에 몇 개월 후 학교를 그만 두었다.

 

학교를 그만 두었던 김 군이 김 사장으로 찾아와 그동안의 삶을 고백했다.

학교를 그만 둔 후 트럭 조수로 일을 하며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운전기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고입 검정고시 통신 강의록으로 공부를 했다.

그리고 월급은 저축했다.

군복무를 하면서도 공부를 해 고입 대입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제대 후 그동안 저축한 돈으로 트럭 한 대를 샀다.

모래를 운반하는 사업으로 해마다 차량을 구입해 수십 대를 운행했다.

 

늦게야 야간 대학을 졸업했다.

지금은 대전의 모 건설회사 대표가 되었다.

저를 용서해 주고 등을 두드려 사랑해주신 그 감정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교직의 보람과 용서의 힘이 위대함을 깨달았다.

 

2018. 5.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