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사진 일기

2020. 6. 1. 사진 일기(아내 성모정형외과 진료)

무봉 김도성 2020. 6. 1. 06:01

그동안 목디스크 통증으로 잠을 못자던 아내가 오늘 아침에는 간밤 약도 먹지 않고 잘잤다고 했다.

아침에 아내가 너무나 고마워 악수를 했다.

오늘 오전 정형외과 지료를 더 받아야 겠다.

어제는 하루 종일 집에서만 지냈다.

매일하던 테니스도 하지 못하고 집에만 있으니 무기력해 져 큰일이다.

오늘부터 가까운 산행이라도 해야 겠다.

이른 아침을 챙겨 먹고 9시 조금 지나 아내 데리고 정형외과에서 진료를 받았다.

치료비가 어제는 96,000원 오늘은 81,700원이다.

정형외과 진룝가 왜이리 비싼지 모르겠다.

물리 치료 중에 10시 조금 넘어 요양보호사가 병원에 왔다.

내가 아내 치료 마치면 데리고 갈테니 커피믹서와 고무장갑 그리고 나프타렌을 사라고 돈을 줬다.

정형외과 치료 마치고 나왔는데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약국에서 소화제를 12,000원 주고 샀다.

내과 병원 진료를 받으면 3,000원이면 약처방 까지 받는데 속이 상했다.

집에 와서 점심으로 아내는 죽을 끓여 줬다.

신용관 교장에게 시집을 부칠겸 나가는 길에 마트킹에 들려 생식품을 샀다.

오후 4시경 아내가 속이 불편하다며 연세내과에서 진료와 약처방을 받아 왔다.

결국 낮에 소화제 약국에서 산것은 돈만 버렸다.

저녁에 아내 죽을 끓여 주었다.

식사후 걷기운동 나가려고 나도 옷을 갈아 입고 아내도 신발을 신겨 걷기 운동을 하는데

오른쪽 다리가 아프다고 잘 걷지못했다.

너무 힘들고 버거워 아내에게 짜증을 냈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하나 생각하니 따분하고 한심했다.

 

 

 

 

 

6.25 발발 70년을 맞아 내가 10살에 보았던 실화를 올려 본다.

 

10년전 조선알보에 투고 했던 기사를 올려 본다.
나와 6.25 조선일보 기사
2010. 4. 23. 조선일보 6면

▲ 김도성(70·경기도 수원시 거주)
내 고향은 충남 서산시 고북면. 유엔군이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되찾은 직후 우리 마을에도 국군이 북한군 잔당을 소탕하러 진격해 왔다. 하지만 국군 탱크는 면 소재지 남쪽 언덕에 머무른 채 공포(空砲)만 쏘아대고 있었다. 마을에 인공기가 걸려 있는 탓에 아직 북한군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워 섣불리 내려오지 못한 것이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9월 30일이었던 것 같다. 새벽녘에 "팡"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밖에 나가보니 6척 장신(長身)의 스님 한 분이 오른손에 사제(私製) 권총을 들고 늠름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인근 고찰(古刹)인 연암산 천장암(天藏庵)의 주지였다. 스님은 면사무소에 걸린 북한 면당위원회 간판을 주먹으로 일격(一擊)해서 떼어낸 후 우물에 처박아버렸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영웅호걸의 무공을 보는 듯했다. 이어 스님은 바로 옆 주재소(경찰지서) 국기게양대에 걸린 인공기를 내려 발기발기 찢어버린 뒤 허리춤에서 태극기를 꺼내 최대한 높게 게양했다. '신호'가 올라가자 그제야 국군 탱크는 마을로 내려왔다.

국군을 본 마을 사람들은 통곡을 했다. "하루만 먼저 오지 그랬소. 그러면 우리 아들이, 우리 남편이 죽지 않았을 텐데…."

바로 전날 밤 북한군은 임시 감옥으로 사용하던 소방대 창고에 불을 질러 가둬두었던 공무원과 지주(地主)들을 죽였다. 태극기가 하루만 더 일찍 올라갔더라도 여러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스님에게 왜 그런 활약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소방대 창고에서 죽어가는 사람 목숨을 하나라도 더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다들 생각했다. 커서 교사가 된 나는 학생들에게 스님과 태극기 이야기를 수십년간 해왔다. 60년이 지났지만 스님의 통쾌한 몸동작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재경 홍고동문들이 소요산을 다녀 왔다고 사진을 보냈다.

60년만에 사진으로 보는 친구라 조창희 동문 하나 밖에 알 수가 없다.

참석자/ 김광경,김창현 김용해 김철웅 김홍랑 이명복 이철웅 조창희 이병식 부인 두 분

 

 

 

 

◆2020/06/01(월) 구십이자술 18 (나의 영원한 스승, 백낙준 1)

 

나의 영원한 스승, 백낙준 1

매우 순진한 어린 나이에 학교에 다니면서 나를 사랑해준 선생님들을 이 날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장래에 크나 적으나 기대를 걸어 주었던 분들로 기억은 하지만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스승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본디 나는 평안남도 맹산 출신으로 평양에 살다가 해방을 맞았는데 난데없이 김일성 장군이라고 선언하고 등장한 김성주가 차차 실권을 장악하고 혁명 아닌 혁명으로 집권하는 것을 지켜 보아야 했다.

1917년에 있었던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을 고스란히 반복해보려는 김일성 아닌 김성주의 폭정에 시달리다 못해 월남을 결심하여 어머님을 모시고 평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원산에 들렀다가 철원을 거쳐 연천에서 38선을 넘은 것이 지금으로부터 74년 전이다.

1946년 연희대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백낙준 총장을 만나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총장 시간이 있어 본관에 마련되어 있던 소강당에서 말씀을 하셨는데 그 시간의 가르침이 나의 한평생의 방향을 정해주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백 총장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청산유수였다. 어쩌면 그렇게 말씀을 잘하시는지 감수성이 예민하던 젊은 내 가슴에 충격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내 옆자리에 앉아서 가지고 온 책을 읽고 있는 자는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열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도 그 시간에 듣는 강연이 나에게는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김동길

Kimdonggi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