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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경기 수원시 장안구(현재접속지역) 읍·면
요즘 아내의 공복 혈당이 높아 걱정이다.
17,80으로 혈당 조절이 되지 않고 있다.
원이이 무엇일까 이러할 때 가슴이 미어지도록 답답하다.
밥맛이 없다며 밥을 제대로 먹지 않는다.
그래 중간중간 간식을 자주하게 된다.
그래서 혈당 조절이 안되는 것 같다.
합병증이라도 올까 걱정이 된다.
이른 아침을 먹고 테니스 코트에 갔다.
젊은 회원들과 어울려 두셑 경기를 했다.
오늘 12시 사당역에서 안시회 모임이 있는 날이다.
11시경 집을 나서 사당동에 갔다.
안시회원 6명이 전원 출석했다.
식사후 집으로 왔다.
식당에 현금 카드를 놓고 와서 다시 다녀 왔다.
돈 천원의 가치를 생각해 본다
김도성
안산, 시흥시 중등학교 퇴임 교장모임을 안시회라 부른다.
매월 둘째 주 금요일 교통이 편리한 장소를 정해 만난다.
월 회비는 2만원으로 갹출 했는데 24명으로 시작한 모임이 회원 중에 별세하신 회원과 몸이 불편해 나오지 못하는 분이 있어 현재 6명이 남았다. 1회부터 막내인 제가 총무를 맡고 있다.
총무라고 별도로 회비를 감면해주는 것도 없이 20여년을 봉사했다. 그래 가끔 나는 농담을 한다.
“선배님 다들 돌아가시고 나면 누가 내 부의금을 챙겨 줍니까? 자식들에게 제발 유언을 남기시기 바랍니다.”
“이 봐 총무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네.” 선배들이 웃으며 말했다.
금년 1월(219회)부터 모임을 해산하면 좋겠다고 제안 했으나 두 명이 남을 때까지 총무가 수고해 달라 부탁했다. 저보다 나이 많은 선배님들 부탁이라 80인 제가 계속 총무를 보겠다고 하며 몇 가지 제안을 했다.
1. 앞으로 월 회비는 만원으로 부족한 식대는 예치된 회비로 충당한다.
2. 모임장소는 사당역 14번 출구 좌측 건물 웃찾소 식당에서 12시 모인다.
3. 1회 이상 결석할 때는 다음 출석할 때 1만원 만 추가한다.
회비 1만원을 내고 식대는 평균 1인 2, 3만원을 지불했다.
회비 만원에 고기나 생선을 먹게 되니 출석률이 좋아 졌다.
오늘 5월 10일 모임 223회(18년 7개월) 웃찻소(웃고 찾는 소고기) 식당에 6명 전원 출석했다.
오늘도 회비 6만원 에 찬조 만원 7만원 입금에 식대 15만원으로 8만원을 회비 잔액으로 충당했다. 이대로 가다간 앞으로 10월이면 회비 잔액이 없어 질 것 같다.
오늘 식사 후 2시경 해산했다.
수원을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하체가 없는 불구 남자가 바지대신 자동차 투부를 두르고 땅을 기어 다니며 구걸을 했다. 나는 핸드폰 케이스에 구겨진 천 원 한 장을 꺼내 돈궤에 넣었다. 마침 버스가 도착해 차에 타려고 발을 올려놓는데 전화가 왔다. 웃찻소 식당에 식대를 계산하고 현금카드를 놓고 갔다는 것이다. 버스를 타지 못하고 다시 식당에 다녀왔다.
만약에 천원을 주지 않고 버스를 탔으면 이미 출발 후 전화를 받게 되어 중간 정류장이나 아니면 다시 사당에 다녀와야 했을 것이다.
식당을 오고가느라 땀을 흘렸으나 음덕-양보( 陰德陽報 ) 라는 말이 생각났다.
2019. 5. 10.
오후 5시경 아내 저녁상을 차려 주고 이사회 참석차 양승본 소설가와 문집에 갔다.
이사 임원들이 많이 참석했다.
회장의 무능과 B** 사무국장의 일방적인 도재적 업무처리로 이사회의가 시끄러웠다.
결국 정식 절차 처리를 거치지 않고 처리한 업무를 복권시키고 정식 절차에 따라
정식 협의를 거쳐 업무를 처리 하도록 마무리 했는데 당분간 후유증이 있을 것 같다.
B** 사무국장으 지나친 고집과 독단적 처사에 현장에서 해임건의 안이 상정되어
스스로 사임을 했다.
수원문협 이사회
◆2019/05/10(금) 형제 생각(37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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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생각 원남면 면장의 따님인 나의 누님 김옥길은 그 시골에서 보통학교를 마쳤다. 나와는 나이 차이가 7년이나 있는데, 나는 전혀 기억이 없지만 그 누님은 나를 업어서 키웠다고 자랑하곤 했다.
어느 해, 미국 뉴욕에서 우리 두 사람이 United Board 의 연중행사 만찬에 초대 받아 참석한 적이 있었다. 내 누님이 먼저 한마디 인사를 했는데 그 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 하면서 “내 동생이 아주 어렸을 때 내가 업어서 키웠습니다”라고 우수개 소리처럼 한마디 하니 그 뒤에 단위에 올라가 연설을 해야 했던 내가 얼마나 난처했겠는가?
나의 형은 무척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지만 제대로 그 능력을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일제말기에 징병제가 강요 되면서 일본 군대에 끌려가 해방이 되기 얼마 전 22살의 젊은 나이에 전사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형이 돌이 될까 말까한 나를 안고 시골집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평양에서 월남하던 보따리에 끼어 서울까지 왔지만 6.25사변 때 그만 잃어버려서 나의 아름다운 나체를 과시할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나의 아버님이 상자에 든 그 아들의 유골을 안고 어머님과 함께 소만 국경으로부터 평양역에 도착하셨을 때 평양역에는 굳은 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아! 내가 어찌 그날을 잊을쏘냐. 해방이 되고 나의 어머니는 그 아들이 돌아 올 것으로 믿고 매일 기다리셨다. 돌아오지 못할 줄을 아시면서도.
김동길 Kimdongg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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