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사진 일기

2017. 3. 20. 사진 일기(담쟁이 문학회 몇 사람 송탄 대륙반점에서 만나다.)

무봉 김도성 2017. 3. 2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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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테니스대회 호주 오픈 바브리카 우승 장면 동영상

http://tvpot.daum.net/v/v57e9xRbwbUYsww44RbUpRY

 2016. 7. 15. 김용복 이준찬/장대원 박승혜 테니스 경기 동영상

http://tvpot.daum.net/v/v5b08ff7BiwuOBEnjfnmijm

이른 아침을 챙겨 먹고 테니스 코트에 나가는 길에 아내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들렸다.

어제 저녁에 아내가 좋아하는 묵은 김치 볶음해 놓은 것을

아내가 아침먹을 때 먹을 수 있도록 전해 주고 싶었다.

멸치 다시마 대파 양파를 삶아 육수를 내고 묵은 김치를 두 포기 썰어 넣고

들기름 삽겹살 소고기등심에 설탕을 조금 넣어 오래 삶았다.

아내가 덜무른 김치를 좋아하지 않기에 나도 두고 반찬으로 먹어야 하기에 넉넉히 볶았다.

그래서 오늘은 송탄을 가기 때문에 낮에 아내를 볼 수가 없어

아침에 과일과 김치 볶음을 들고 아내를 찾아 갔다.


그런데 어제 무엇을 잘 못먹었을까 약간 설사를 했고 아랫배가 묵직하게 배탈이 났다.

혼자 살면서 음식을 한 번 만들어 놓으면 며칠을 두고 먹은 것이 상한 먹었나 보다.

젊었을때 축농증 수술후 냄새에 민감하지 못한 후각 때문에 음식이 상했는지 몰라 버리기 아까워

먹다보면 배탈이 종종 나고 있다.

큰 일이다 오늘은 나 때문에 고향 선배님이 오래 전부터 마련한 자리인데

못 간다고 말할 수도 없고 걱정이되었다


우선 테니스 코트에서 젊은 회원들과 어울려 타이트하게 전신에 땀이 배도록 테니스를 했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집 앞 내과 병원에 들려 주사 맞고 약처방을 받았다.

요즘 장염이 흔하니 약을 잘 챙겨 먹고 식사는 밥대신 죽을 먹어야하며 물을 많이 마시라고 했다.

주사 맞고 약을 먹으니 배가 조금은 편했다.


10시 30분경 송탄에 가기위해 수원역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수원 역에서 7정거장가면 송탄역이었다..

전철을 타고 가는데 베스트 산부인과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지난주 아내 자궁경부 조직검사 결과가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혹시나 무슨 이상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니 감사했다.

아내에게 직접 전화를 했고 딸들에게 카톡으로 소식을 전했다.

월강 장영자 시인이 자가용을 몰고 전철역에 마중을 나왔다.

차창밖으로 펼쳐진 시골풍경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즐거웠다.

잠시 약속한 12시에 서울에서 담쟁이 문학회 이영순회장 고하 조유자 이사

정송옥 자문위원이 차량운전으로 도착했다.

장영자 시인이 운영하는 대륙반점에 앉자 마자 음식이 차려 졌다.

오늘 의사가 죽을 먹으라 했는데 음식을 먹어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하고

먹어보니 배탈 통증에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맛있는 동동주가 나왔는데 술은 삼가했다.

알고 보니 오늘이 정송옥 선배님이 생신이라 생일 축하 노래도 부르고 케익도 잘랐다.


아주 오래전 근처 진위면 소재 이따리아노 경양식 식당이 생각이 났다.

저녁은 선배 생일 축하자리로 내가 마련하겠다고 하여 장영자 시인이 운전하는 자가용으로 안성 양성

3.1운동 만세 유적지를 관광했다.

모처럼 숲이 우거진 유적지를 돌아보는 마음이 행복하고 즐거웠다.

따뜻한 봄 햇살속의 춘분 속에 새봄을 맞은 나뭇가지가 푸르게 변신을 하고 있었다.

오후 4시경 진위면동천리 508번지 이따리아노 경양식 식당에 들러 저녁 식사를 했다.

점심 저녁을 포식했는데 배탈에 이상이 없어 다행이었다.

나는 진위역에서 전철을 타고 수원 집에 8시경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샤워 후 렌즈위에 올려 놓은 김치찌개를 상할까 걱정되어 다시 끓였다.

그리고 블로그 정리하며 사진을 올리는데 어디에서 김치 타는 냄새가 집안에 진동했다.

상하지 말라고 다시 데우려 올려 가스렌즈에 위에 놓은 김치찌개를 새까맣게 태웠다.

냄비바닥을 긁어 내려면 한 참 고생을 하겠다.

이러할 때 홀로 남의 삶이 서글프다.

간강이 회복되어 아내가 빨 돌아 와 함께 살면 좋겠다.



아침 7시경 아파트 후문거리 풍경



 장안구청 주차장



 아파트 주차장



 새벽운동을 즐기는 동호인들



 삼일공고 테니스 코트



수원화성의 동북포루



송탄 대륙반점 식당



정송옥 선배님



월강 자영자 시인이 음식을 서빙하고 있다.



탕수육




아이들처럼 단체 기념도 촬영해 두고



이 사진을 ㅂ라보는 먼 훗날 하나의 추억으로 남겠지



문학을 하는 문들이 맛있는 음식 앞에 앉으니 세상 시름을 놓을 수 있어 좋았다.



오누이처럼 마주보고




축하 생일 케이도 자르고



생각지 않은 축하에 정송옥 선배님도 행복해 하셨다.



샴페인도 터트리고



생일측하 노래도 부르고



아주 오래도록 남을 생일축하 파트에 모두 행복했다.



순간 멈춰진 추억들 기억속에 남을 것이다.



후일 유명 문인 으로 남는다면 문학관 벽에 걸릴지 모르것이다.



아이들 처럼 행복해 하는 모습이 보기가 좋다.




아읻르처럼 꼬깔을 쓰고




케익도 자르고



이영순회장님 저다리 국보급이네



축배를 들어 건배도 하고



아이들처럼 사진도 많이 찍었다.



모두들 즐거워 만면에 웃음이






양성 3.1만세 기념관에서



햇살 좋은 춘분의 봄날




                  제44회 스승의 날 회고

                        글 / 무 봉

1965년 내 나이 25세 총각교사로 교직에 첫발을 디뎠다.
대전 변두리 공동묘지 터를 닦아 세운 신설 중학교였다.
기독교 학교로 전국각지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절반이었다.
그래 봐야 교직원이 13명 전교생이 120여명 밖에 안 되었다.
나는 수학과 과학과목을 담당하며 기숙사 남자 사감이었다.
학교는 산속에 위치한 신설 된지 얼마 안 된 학교였다.
학급당 40명으로 남여 반반 혼합 반 편성 해 운영했다.
만학을 한 학생들이 많아 17,8세로 교사인 나와 10년차도 안 되었다.
6.25 전쟁 당시 미군을 학살 처형 매장한 곳이라 유골이 많았다.
발목부터 무릎까지의 뼈의 길이가 길어 미군들의 유골임을 알 수 있었다.
간혹 파란 약병에 편지를 써 넣어 유골과 함께 나온 유서가 발견되었다.
영문으로 된 유서의 내용에는 이곳은 미군의 무덤이며 소속부대와 사망 병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이런 병들이 여러 개 발견 되었지만 반공시간에 선생님들이 교육 자료로 활용했을 뿐 경찰서에 신고하는 것을 몰랐다.
미국의 유족들이 찾는 중요한 단서가 되지 않았을까 가끔 아쉬운 생각을 해 보았다.
한 여름에는 주변 산에서 내려온 뱀 때문에 교실이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교사 중에 도시락에 뱀이나 개구리를 넣어 부인이 놀라 실신 한 적도 있다.
뱀의 머리를 엄지와 검지로 가려잡고 꼬리를 셔츠 소매에 넣어 악수를 청해 놀란 동료교사들이 많았다. 지금은 모교단의 유명한 은퇴 목사님이다.


“ㄱ”자 모양의 한옥 개와 기숙사 건물로 맨 첫 방을 여 사감이 사용하고 끝 방을 남자 사감인 내가 사용했다.
여 사감도 처녀, 타관 객지로 하숙할 형편이기에 나와 함께 사감을 했다.
1965년 7월 여름 방학 며칠 앞두고 여 사감 시계 도난 사건이 일어났다.
주말로 대부분의 기숙사생들이 집에 다니러 갔었다.
남녀가 함께 사용하는 세면대 앞에 놓아둔 여 사감 시계가 없어 진 것이다.
지금은 시계가 흔해 사은품으로 얻어 차지만 당시만 해도 비싸고 귀했다.
기숙사에 남은 학생은 남학생이 둘 여학생이 셋이었다.
분명이 다섯 학생 중에 범인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여선생이 말렸지만 기독교 학교로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다는 편견 때문에 학생들을 모아 놓고 훈계했다.
나는 지금도 그 시계사건 때문에 가슴이 무겁고 후회를 많이 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사람은 누구나 순간적으로 시계가 탐이나 실수를 할 수 있다.
내일 월요일 아침까지 선생님이 잘 볼 수 있는 교무실 책상 서랍이나 교탁에 놓으면 용서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다행이 월요일 출근해 서랍을 열어 보니 시계가 있었다.
용기 있는 학생이 고마웠다.
그런데 시계를 싼 종이가 필기한 생물노트를 찢은 종이다.
호기심에 필적을 감정해 보니 A와 B 두남학생 중 B군의 노트였다.
전교생 중 18세로 나이가 제일 많은 2학년 학생 A군의 소행으로 의심했었다.
시계를 갖다 놓은 것은 기특했으나 같은 반 친구 B군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 미웠다.
나는 더 이상 물을 것도 없이 당일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 저녁식사 후에
뒤편 공동묘지로 A학생을 불러 엉덩이에 매질을 했다.
“나쁜 놈! 잘못은 네가 하고 나이어린 동생 같은 친구에게 생물 노트를 찢어
누명을 씌워. 바른대로 말해 이놈아! “
무릎을 꿇고 엉엉 울며 용서를 빌었다.
나와 일곱 살 차이 고향에서 공부하는 막내 동생이 생각이 났다.
“네 잘못을 아느냐?”
“예! 선생님.” “선생님이 왜 화가 났다고 생각하느냐?”
“친구에게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됐다. 용서 하마!”
끌어안고 등을 어루만지며 나는 울며 용서를 했다.
그런데 시계 도난 사건 소문이 학교에 퍼져 학생들 입을 통해 학부모 항의 전화가 빗발 쳤다.
결국 학생부에서 징계 위원회가 열려 퇴학처리하기로 처벌이 내렸다.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으나 신출 총각선생인 나는 소용이 없었다.
내가 그때 사표를 쓰고 학교를 떠났어야 했다.
나는 용서를 빈 학생과의 약속을 지켜 주지 못했다.
그 학생은 금산 추부면 학생인데 나이도 많아 집에 가서 아버지 농사일을 돕겠다고 했다.
이 때 나는 기독교 학교와 종교에 대한 懷疑(회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65년 11월 결혼하고 신혼 생활로 마음잡고 지내다 보니 두 딸을 낳아 5년을 지냈다.

5년 후 1970년 사표를 내고 서울로 학교를 옮겼다.
1974년 겨울 육남매 중 맨 위 한분 누님이 대전 박 외과 병원에서 위암 수술로 입원했었다.
누님 병문안 차 대전에 내려갔었다.
병원 응급실 의자에 앉아 있는데 젊은 청년이 선생님 하면서 인사를 했다.
낯이 익어 자세히 보니 A학생 김 군이었다.
반가우면서도 죄인처럼 두려웠다.
“작년에 선생님을 찾아뵈러 학교에 갔는데 그만 두셨다고 하더군요.”
“몰라보게 장성한 청년이 되었군. 그래 자네는 어떻게 지내나.”
“”예! 선생님 덕에 잘 살고 있습니다. “ 내게는 원망서린 말 같아 괴로웠다.
“그동안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식사나 함께 하며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행색은 기름 묻은 작업복 차림에 얼굴이 많이 그을렸으나 예의범절이 깍듯했다.
고급 한식식당으로 안내 했다. 근사하게 차린 주안상이 들어 왔다.
시중드는 아가씨들 모두 나가라 했다.
김 군은 먼저 “선생님 고맙습니다.” 하면서 내게 큰 절을 올렸다.
나는 맞절로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잔을 올렸다.
“첫잔은 감사의 잔이고 둘째 잔은 강령의 잔입니다.”
그 다음에 내가 주는 잔을 모로 앉아 마셨다.
“가만있자 자네가 지금 스물일곱 아닌가?” “예! 맞습니다.”
“결혼은 했나?” “아직 총각입니다.”
“그동안 나를 원망 많이 했지. 하고 싶은 원망 모두 받겠네.”
“선생님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오히려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중2 때 학교를 그만 둘 때가 18세었습니다.”
“반년동안 농사일 돕다가 그 이듬해 트럭운전수가 되기 위해 트럭 조수로 일했습니다.”
“2년 후 21세 때 운전 면허증을 땄습니다.”
“운전기사로 취직하여 월급을 꼬박꼬박 저축했습니다.”
나는 A군의 이야기에 빠져 담배를 꺼냈다. A군이 불을 붙였다.
흥미와 긴장된 마음속에 한 모금 길게 담배를 빨아 뱉었다.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트럭 한대 구입하는 것이 소원 이었습니다.”
“저축한 돈과 빚을 내어 트럭 구입했습니다.”
“내차로 건축현장에 자갈 모래를 운반해 쏠쏠하게 돈을 벌었습니다.”
“바로 밑에 동생도 운전면허를 따게 해 함께 열심히 일했습니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 트럭이 3대를 굴렸습니다.”
“제대 후 지금은 12대 트럭을 운행하는 **운수회사 사장이 되었습니다.”
“운전기사가 사고를 내어 피해자 가족과 환자 면회 차 병원에 왔다가 우연히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학교에서 용서를 해주었다면 제가 오늘 이렇게 돈을 벌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래도 공부를 못한 것이 평생 한이 될 터이니 검정고시 준비 하여 고등학교는 마치도록 하게나.”
“대학은 나중에 늦게 시작해도 되니 명심하게나.”
“예! 선생님 명심하겠습니다.”
장시간 이야기로 주고받은 술이 과했는지 취기가 올랐다.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그 후 전화 연락을 가끔 했는데,
1976년 수원으로 학교를 옮기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그 후 교장으로 있으면서 퇴학 결재만은 몇 번이고 보류했다.  
지금도 그 학생의 퇴학을 막지 못한 나의 나약함에  모진 질책을 해 본다.

                         2009. 5. 15.

                    제44회 스승의 날 회고







안성의 양성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의 독립만세 유적지를 처름 들린 감회가 새로웠다.






기념관 숲속에서 봄을 만끽했다.





기념 탑 앞에서







진위면 동천리 508번지 이따리아노경양식식당



담쟁이 문학회 이영순회장




월강 자영자 시인




고풍이 넘치는 이따리아노 식당





올갠을 연주하는 고하 조유자 시인



고하 조유자




오랜만에 근사한 식당에서 고급양식을 먹었다.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가슴에는 행복한 감성이 흐르고



무봉이 자리를 마련한 취지를 인사말로 전하고



러시아 서빙 아가씨가 사진을 짤못 촬영해 아쉬웠다.




이따리아노 정식





와인잔을 터트려 건배하고



이이상 즐거울 수가 없었다.



조각 동물 농장



기념사진도





동물농장



이따리아노 식당 정문 앞에서





모두 떠나버린 진위역에서





2017/03/20(월) -틸러슨과 왕이- (3246)

 

미국 국무장관과 중국 외무부장이 북경에서 만났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하도 긴박한 가운데 두 사람의 만남이 전 세계의 관심을 끄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로 여겨집니다.

미국은 한국과 군사동맹을 맺은 나라이며 ‘혈맹’이라고 할 만큼 끈끈한 관계를 수십 년 유지해온 나라이고, 그 반면에 중국은 6.25 사변 때 풍전등화와 같던 김일성의 정권을 살리기 위해 자진하여 참전하여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 북조선을 ‘혈맹’으로 여기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중국은 한반도에서 미국의 힘이 더 커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되도록 한국과 미국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공작을 오래 전부터 하고 있습니다. 북이 핵무기를 생산하게 된 배후에도 중국의 도움이 상당히 컸을 것으로 짐작되며, 유엔 안보리가 북한의 미사일을 가지고 불장난을 할 때마다 엄중한 제재를 결의하지만 제재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지 중국은 어떤 특단의 조치도 하지 않습니다.

틸러슨은 17일 판문점을 방문했을 때 매우 심각하다 못해 비장한 표정을 지었고 왕이를 만났을 때 한반도 ‘사드’ 배치 등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피력하였고, 왕 외교부장은 ‘사드’ 때문에 한국을 볼 때 ‘쓴 오이 보듯’ 하던 그 태도를 다 보리고, 매우 공손하게 웃는 낯으로 그를 대하는 것을 보고 약소국에 태어난 나 자신의 신세를 조금은 원망하였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살 길은 따로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하여 우리는 기가 죽지 않아야 합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시제時制의 와중渦中에서

 


우리 젊은 날의 이데아는
어느 시간의 초침에서
화석이 되어 머물렀을까
장닭의 홰치는 소리
그 회로의 숫자는 기억 속에
얼마나 감지되어 있을까
검푸른 지중해의 끝자락에서
한 올의 햇살 끌어당기던
그 미세한 불가항력적 힘의 논리를
친구여 기억하는가
가을 깊은 날 캠퍼스 은행나무 아래
황금색으로 물든 꿈빛 낙엽을 주우며
낭송하던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혀끝에 감기던 감미로운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를
그 기억의 되새김 멈추지 않았겠지
함께 즐거워했던 그 때를
오늘은 피드백 풀어보고 되감는다
삭제의 클릭으로
손놀림 아래 현재의 시제는
다시 과거 시제로 묻혀버리고

 


詩/맹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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