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기억들
김도성
뇌경색으로 반신이 불편한 아내를 데리고
저녁마다 걷기 운동으로 산책을 한다
벌써 6년이 넘도록 간병을 하고 있다
콩나물 뿌리 자라듯이 아주 조금씩 좋아진다고들
말하지만 더 이상 나빠지지 않는 것이 고맙다
그동안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아내가
요즘은 손목이 아프다는 핑계로 나의 손목을 잡는다
젊은 날 다른 부부 손잡고 걷는 것이 부럽다던 아내
요즘은 자랑이나 하듯 내 손을 잡고 손이 따뜻하다느니
손을 잡으면 든든하다느니 나이답지 않게
아양 떠는 모습이 가관이다
언제나 걷는 코스 중간쯤에 벤치에 앉으면
달을 보며 어제보다 달이 더 배가 부르다고 혼잣말을 한다
어디서 들었는지
나무는 뿌리부터 늙고 사람은 다리부터 늙는다며
나의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꾹꾹 찌르며 묘한 웃음을 짓는다
나는 산책 중에 거의 말이 없는 편이다
아내가 입버릇처럼 내게 자랑하는 말이 있다
박봉으로 어렵게 키운 세 딸들이 잘 살고 있어 감사하다고 했다
두 딸을 낳고 대전 모 조그마한 학교에 근무할 때이다
화폐개혁 후 월급이 이천 원 정도 했다
그때 양복 한 벌이 삼천 원 했다
아내에게 외식시켜준다며 대전에 설렁탕으로 유명한 한밭식당에 갔다
아내 말에 의하면 설렁탕 한 그릇 시켜주고 나는 국물 조금 달라고 해
붉은 눈물 같은 깍두기 국물을 퍼 먹었다고 했다
그때 그 가난으로는 아이들 교육이 어렵다는 판단에
신문에 교사모집광고를 보고 서울 금천구 시흥동 모 학교로 옮겼다
그 학교도 5년 근무하다가 학교의 부정부패가 심해 몇 동료와 부정을
고발하고 사표를 냈다
경기도 순위 고사 합격 후 발령 대기 중에 있었다
시골학교로 발령받으면 자녀교육도 그렇고
아내와 떨어져 살면 죽는 줄 알았다
기회만 있으면 다시 서울 명문 사립학교로 갈 생각에
서울 독산동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사립학교 삼일학원에 근무하게 되었다
몇 년 전 책꽂이 책들을 정리하다가
시집간 50대 큰딸이 보훈원 앞 연무동 살 때
수원여자중학교 2학년 일기장을 보게 되었다
7월 22일 목요일 맑음
오늘도 무지 덥다
학교를 마치고 교문 앞을 지나는데 아이들이 쭈쭈 바를 사먹었다
더위는 더 심했고 갈증이 났다
아침에 엄마가 준 차비 이천 원 중 갈 차비 천 원밖에 없다
너무나 쭈쭈 바가 먹고 싶어 천 원주고 사 먹었다
그리고 그 무더운 여름 십리 길을 걸어왔다
골목길 들어서니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얼굴이 저녁노을에 붉게 물들었다
그 일기장을 본 후로 나는 세 딸들에게 죄인이 되었다
아내가 산책할 때마다 내게 자랑하는 말
“여보! 난 우리 딸들이 잘 살아줘 고마워요.”
속 한번 썩이지 않고 공부 잘해 원하는 대학 장학생으로 졸업해 바로 취직해
월급 꼬박꼬박 저축해 혼수 장만해 시집가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다
너무나 가난하게 살았던 아버지 때문일까 억척같이 아끼고 저축해 딸들이 나보다
모두 부자다
아내가 처음 뇌경색으로 입원했을 때부터 가족 단 톡을 하며 서로 안부를 묻는다
어제 막내딸이 톡을 했다
“나 영통 아파트 하나 처분했어.”
“얼마나 벌었니?”
“응, 쪼깨 벌었어.”
“고맙다.”
그 가난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어 미안했다
“맛있는 것 살께.”
오늘 새벽 동편 하늘이 붉게 물든다
2019.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