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사진 일기

2019. 4. 9. 사진 일기(경기대 시창작 수강)

무봉 김도성 2019. 4. 9.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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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경기 수원시 장안구(현재접속지역) 읍·면

밤 아내가 잠을 잘자고 속도 편안하다고해 마음이 놓였다.

공복상태의 혈당을 체크해 보니 97로 정상이다.

어제 저녁식사를 너무 적게하여 저혈당이 올까 걱정을 했다.

아침에 먹을 수 있는 밥을 줄을 쑤어놓고 반찬으로 계란 후라이를 했다.

나는 생식으로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테니스 후 갈아입을 챙겨 테니스코트에 나갔다.

한 경기후 따으로 젖은 몸을 샤워하고 상의를 갈아입려보니 아내옷을 잘 못챙겨 왔다.

하는 수 없이 운동하던 잠바를 입고 경기대 평생교율원 시창작 교실에 갔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은 내가 우렁쌈밥으로 샀다.

쌈 된장이 맛이있어 아내 생각에 만원어치 포장을 했는데 김동찬교수가 대금을 냈다.

2시경 집에 도착하자마자 피곤하여 5시까지 낮잠을 잤다.

앞으로 4개월 먹을 연세 생식이 택배로 왔다.

2019년 1월부터 오늘까지 황성주 생식으로 아침을 먹었다.

복부 미만이 줄어들어 생활하기에 편하다.

그래 가격이 저렴한 연세대학교 생식을 주문해 내일 부터 먹을계획이다.

아내가 양배추를 삶아 쌈장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소화력이 떨어졌는지 계속 죽을 먹으며 기름이나 밀가루 음식을 삼가하고 있다.
























































2019/04/09(화) 우리 동포 50만을 어찌할꼬?(344)

 

우리 동포 50만을 어찌할꼬?

1910년 한일 합방이 강행되기 이전에도 구한말에 많은 노동자들이 일본에 끌려가 탄광일을 비롯한 힘든 노동을 도맡아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일본에서 사는 한국인이 무려 140만 명이나 되었다고 전해진다. 해방이 되고 일본을 통치하던 미군정이 주선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고향땅으로 돌아 올 수 있었지만 일하러 갔다 일본 땅에 눌러앉아 살게 된 동포들도 한 60만 명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해방이 되면서 김일성을 위시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은 교포사회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교포사회를 대표하는 친북인사들 중에 대표자는 한덕수였고, 그는 김일성의 총애를 받아 북한에서 권력 서열 3위 까지 올라간 적도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북한을 조국으로 여기며 인민공화극에 강한 소속감을 갖는 이른바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계가 제일 동포 40만을 묶어 단단한 단체로 만들었고, 200여 곳에 학교를 세우고 심지어 조선대학까지 설립하였다. 조총련은 처음부터 막강한 힘을 가지고 일본사회에서 엄청난 정치 세력이 되었다.

 

이에 반해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22년간 옥중에 갇혀 있던 박열이 출옥하여 대한민단(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을 조직하고 조총련에 맞서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제 40만 명 이상의 재일 동포들의 단체가 되었다. 그러나 조총련은 90년대에 북한이 격은 극심한 기아사태, 북한의 일본인 납치 사건, 그리고 3대 세습에 따른 독재정권 등이 조청련의 몰락의 길에 들어서게 하여 이제는 4만 명 정도의 단체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 한국을 주름잡는 대한민국의 정치 세력이 조총련의 편을 들어 민단을 업신여기는 새로운 풍조가 판을 치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민단 산하의 50만 동포들이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있을가 암중모색하고 있다고 하니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얼마 전 직접 일본을 찾아가 민단의 지도자들을 만나보고 큰 걱정이 또 하나 생긴 것이다.

 

김동길

Kimdonggill.com




 

 

 


(조길자 수필가 추모 )

 

 


꽃처럼 학처럼

              
하얀 학처럼 고왔던 길자 누님
허공을 가르듯
하늘을 나는 한 마리 학

당신은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겁니다.

 

왔던 길 되돌아가는 길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먹구름으로 속으로 사라진 당신

아침 해를 보는 백합의 웃음도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춤도
지금에 생각하니
그 웃음, 그 고운 몸짓이
이별의 부추김 이었습니다

잘 가시오
평안한 곳에서 행복하시오
비록 몸은 떠났지만
당신의 영혼은 우리의 가슴 텃밭에
오래오래 기억으로 남을 겁니다.


   2018. 8. 2.

 

무봉 김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