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작시 원고

탄피를 줍던 소년

무봉 김도성 2017. 6. 24. 15:46

여러분은 태극기 정확히 그리시나요? 3.1절 맞아 살펴본 '태극기' 


탄피를 줍던 소년


             무봉 김도성


   1950년 6월 25일 새벽 소련 스탈린의 사주와 중국 모택동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 괴뢰집단이 이끄는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침, 국군은 부산지역만 사수하고 남한 전 지역을 괴뢰군에게 점령당했다. 그러나 미군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9월 30일 새벽에 소년이 살던 충청도 서산 **면 고향에 국군이 내려왔다. 남쪽과 북쪽이 높은 언덕길이고 길 아래 면사무소 소재지 마을이 있었다. 열 살의 어린 나이에도 소년은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본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안개 자욱한 미명의 새벽 남쪽 언덕에 있는 국군 탱크가 내려오지 못하고 공포만 쏘아대고 있었다. 소년의 집은 면사무소 옆 국도변에 위치해 있었는데 총소리에 나가 보았다.

 

  그런데 육 척 장신의 건장한 연암 산 천장 암(고향 뒷산) 주지 스님이 오른손에 사제 권총을 들었다. 승복을 날리며 면사무소에 걸려있는 면당위원회 간판과 바로 옆 주재소 간판을 왼 주먹으로 일격 하였다. 떨어진 간판을 우물에 처박아 넣는 광경을 보고 어린 소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후 주지스님은 주재소(지금의 파출소) 사이렌 대에 올라가 국기 대에 걸린 인공기(북한 국기)를 내려 발기발기 찢어 버렸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태극기를 꺼내 게양대에 달고 게양하기 시작했다. 이때 대기하고 있던 국군이 탱크를 몰고 면 소재지로 서서히 내려왔다. 그 인공기 때문에 적군이 있는 것으로 알고 국군의 탱크가 공포를 쏘았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국군을 붙들고 울면서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하루만 먼저 왔어도 우리 아들이, 우리 남편이 죽지 않았을 터인데 하며 통곡을 했었다. 바로 전날 저녁에 소방대 창고와 양조장에 구금한 아군을 불을 질러 처형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상과 이념을 넘어 조상 대대로 품어 온 지주와 소작 인간의 원한으로 같은 마을 사람끼리 죽였던 것이다. 오래전 부모의 조상들 원한이 죄 없는 자식들에게 생사의 재앙으로 닥쳤다. 그 후 소년은 교직에 근무하며 학교에서 행사 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면 주지스님이 게양하던 태극기를 생각하게 되었다. 웃어른들 말씀에 난리가 나면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충고를 잊지 않고 있다. 오히려 수복 후에 군에 갔던 아들들이 고향에 찾아와 자기 가족에게 행한 앙갚음으로 같은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남로당 당원이 설쳤던 ***씨 마을은 어린이와 아녀자만 남고 남자들을 모두 죽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다.

 

  과부가 된 어미는 어린아이를 키우며 너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건너 마을 아무개이니 너는 잊지 말라는 유언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마도 세상이 전쟁으로 혼란이 오면 또다시 비극은 시작될 것이다. 소년이 살던 마을은 북한군이 점령한 기간에 학살당한 사람보다 9.28 수복 후에 같은 마을에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수복 후 군에 간 아들이 잠시 휴가로 고향에 와 보니 아버지가 처형당했고 가족과 형제들이 봉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시로 완전 무장한 군인은 구속된 아버지 원수 소위 빨갱이를 뒷산으로 끌고 가 재판도 없이 죽였다. 80 노모가 형장으로 끌려가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울면서 산길을 따라갔다. 따라오지 말라고 카빈총으로 공포를 쏘며 위협했다. 소년의 기억으로는 군인이 할머니를 향해 조준 사격을 했다. 할머니는 비명도 없이 도랑으로 굴렀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목격을 했다. 눈을 뜨고 보지 못할 비극이었다. 아들도 뒷산 단오에 그네를 타는 큰 참나무 옆 방공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양조장의 술을 담그는 지하 창고가 유치장이었다. 애국청년단이라고 완장을 찬 청년들이 고문하는 장면을 담장 사이로 보았다. 팔목을 뒤로해 철사로 묶은 좌익을 시멘트 하수구에 가로 누였다. 입과 코에 물수건을 덮었다. 여러 개의 맷돌을 옆에 쌓아 놓았다. 배위에 맷돌을 하나 올려놓고 수건에 물을 부으며 물었다. 그래도 묻는 말에 대답이 없자 맷돌을 두 개 세 개 올리며 물을 부어 고문했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여 질식해 죽으면 시체가 되어 실려 나갔다. 어린 소년은 무섭기는 했으나 사람이 죽고 사는 일에 대하여 알 수가 없었다. 남로당 당원으로 밝혀지고 이적행위가 인정되면 총살형을 집행했다. 사형 집행에는 밤과 낮이 따로 없었다. 차고 넘치는 유치장 때문에 처형은 바로바로 이루어 졌다.

 

  소년은 또래 친구들과 탄피를 모으는 일로 재미가 있었다. 사형은 뒷산 단오에 그네를 타던 큰 참나무 옆 방공호에서 이루어졌다. 소년은 친구들과 멀리 솔밭에 숨어 처형 장면을 구경했다.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다. 다시 확인 사살하는 총소리가 울렸다. 바람을 타고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잠시 후 소년은 친구들과 사형장에 달려갔다. 아이들은 자주 보는 시체에 대한 무서움도 없었다. 머리, 가슴 팔다리에 총을 맞아 유혈이 낭자했다. 아이들은 탄피 하나 더 주우려고 구석구석 살폈다. 심지어 시체 사이에 피 묻은 탄피를 주울 때도 있었다. 카빈총탄피는 햇빛을 받아 유난히도 반짝이었다. 눈앞에 죽은 시체가 즐비한데 어린 소년은 죽음이 무엇인지 몰랐다.

 

  전쟁은 어린아이들을 잔인하게 만들었다. 당시에는 총을 쏘는 전쟁놀이가 유일한 놀이였다. 탄피를 주워 아이스케이크를 바꾸어 먹었다. 나무를 총 모양으로 깎아 총을 만들어 토끼와 꿩 참새를 잡았다. 탄피의 뇌관을 뽑고 납 구슬과 화약을 섞어 탄피에 넣고 양초를 녹여 입구를 막는다. 탄피의 뇌관 부분에 성냥골을 넣어 양초로 봉하면 하나의 탄알이 된다. 우산대 파이프를 적당히 잘라 총신을 만든다. 총신에 탄환을 장전하고 뇌관에 충격으로 불이 붙도록 못을 잘라 뇌관에 못 끝을 맞추어 놓는다. 고무줄에 매인 노리쇠를 당겨 방아쇠에 걸쳐 놓는다. 목표물을 조준해 발사하면 엽총처럼 산탄으로 참새는 백발백중한다.

 

  그때의 쾌감은 몸이 짜릿하다. 포수들은 이러한 쾌감 때문에 사냥을 즐길 것이다. 전쟁 3년 동안 소년의 머리에는 붉은 핏속의 시체들로 인해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금년 67주년 6.25를 맞이하여 일제 36년 강점기와 6.25 전쟁 1129일 동안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많은 호국영령들이 목숨을 바쳤다. 목숨을 건 만세 삼창에는 손에 나라의 상징인 태극기를 들었고 적진을 점령하는 전쟁터에서 피아를 알리는 태극기는 목숨처럼 지켰다. 그런데 요즘 공식 비공식 행사에서 국기 경례나 애국가를 생략하는 사례는 국가관 확립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자유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우리는 이 자유와 대한민국 수호를 위해 국가안보에 재무장해야 한다.

            

                   2017.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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