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13.8.11. 안산 중앙역에서 오후 2시에 시인을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다.
11시경 주유소에 들려 주유후 오랜 만에 세차를 했다.
성균관대 역 근처 율전동에 있는 둔내막국수 집에 들려 점심을 먹었다.
시계를 12시 30분 수인 산업도로를 달려 안산 상록수역 입구에서 신호 대기 중이었다.
우측을 바라보니 제일장례식장 건물이 보였다.
문득 우리나라 견지낚시 대가인 송 우 선생의 유시가 생각이 났다.
이미 이른 나이 50대에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유시 "초행길" 생각이 났다.
아직 2시까지는 1시간의 여유가 있어 장례식장에 들어 갔다.
장례식장 현관 우측벽에 내가 만든 서각 작품이 깨끗하게 보존되고 눈에 띠게 걸려 있었다.
나는 초행길이라는 시를 몇 번이고 읽고 사진을 찍었다.
장례식장 관계 직원이 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직원에게 저 초행길 서각작품이 내가 기증한 작품인데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직원의 말에 의하면 문상을 하러 오는 조문객이나 유족들이 많이 읽는 다는 것이다.
송 우 선생은 나의 홍성고등학교 15회 동기동창이다.
고등학교 졸업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해 얼굴을 기억 할 수 없었으나 외자 이름은 기억이 났다.
그동안 가끔 만나는 동문을 통하여 그가 얼마전 지병으로 세상을 떳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췌장암 말기로 죽음을 앞두고 KBS-TV 인간극장 그리운사람 송 우 프로 그램을 방여한 일이 있다.
2000년 1월 27일 58세 젊은 나이로 한 만은 세상을 떠났다.
그를 문병한 친구에게 운명 며칠전 송 우 선생이 종이에 메모 해 조용히 전달한 유시 "초행길"을 손에 쥐어 주었다고 하며 내 놓았다.
그때 당시 나는 서가작품 활동에 빠져 있었으나 시인으로 문단에 꿈을 생각하지 않은 때였다.
초행길 시의 내용이 좋아 서각작품을 만들어 송 우 유족에게 전달해 아버지를 길이도록 해야겠다고 생각 했으나
전달 하는 일이 좀 그러해 많은 사람들이 읽으며 삶을 돌아 보는 장소가 좋겠다는 생각에 제일 장례식장에 기증했다.
작품 연대를 보니 내가 안상상업고들학교 교장 재직시인 2천년 1월로 되어 있다.
만 13년 만에 작품을 보게 되었다.
작품이 하나도 변색이나 손상 없이 잘 보관되어 걸려있었다.
초행길
사초 송 우
누구나 한 번은 가야하는 길이다.
진시황도 이 길을 마흔 일곱에 걸었다.
옛 사람의 눈으로 보면
나는 이 길을 가야할 때가 되었고
오늘의 눈으로 보면 조금 일찍 가는지 모른다.
아내는 너무 빨리 나를 만나 고생이 많았다.
해와 별에게는 해 준 것이 없다.
모두가 미안한 일이다.
사랑하는 아내
귀엽던 아이들
형제들과 친구들,
그리고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곁을 떠나
나는 베적삼 삼베 바지로 갈아 입고
초행길인 이 고개를 홀로 넘는다.
이천년 일월
초행길 홀로 넘는 사초의 뒤를 그리며
홍고 동창 무봉 김 용 복 새김
지금 돌아 보니 송 우 선생은 이미 준비한 죽음을 맞이한 친구다.
송 우에 대한 자세한 이력을 찾던 중 우리 나라 견지낚시계의 대가로 소개가 되었고 그가 살아 자신의 묘비문을 작성해 놓은
내용을 읽으며 이승에서 저승 가는 길을 미리 준비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묘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하단에 기록되어있다.
삼가 고인에 대한 명복을 빈다.
안산 제일장례식장 현관에 걸린 초행길 서각작품
2013. 8. 11. 오후 1시 만 13년 만에 안산 제일장례식장 현관에서 기념 촬영/ 무봉 김용복
세상에 남기는 세 개의 비문(碑文)
나처럼 기막힌 사연을 가지고 산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연을 담아 나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세 개의 비문(碑文)을 남겼다. 하나는 '달님부부 남북(南北) 분단(分斷) 생이별비(生離別碑)'라는 이 세상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비(碑)이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묘비(墓碑)이며, 나머지 하나는 나 자신의 비문(碑文)이다. 세상에 자신의 비문을 자신이 쓰고 세상을 떠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내 앞에서 내 손으로 벌어질 줄은 나는 몰랐다. 그것이 나의 운명(運命)이었다. 당신이 혹시 길손이 되어 홍성과 서산, 서산 방조제의 간월도 간월암이나 갈산에서 남당리를 가다보면 송천리라는 작은 마을의 작은 야산(野山)에 이 세 개의 비(碑)가 외로이 서 있음을 기억해 다오. 그리운 사람아! 이리하여 우리는 서로 아름다운 추억(追憶) 속에 헤어지는 사람이 되었다. -송우선생의 글중에서- 2001년 5월6일이 송우선생님이 돌아가신지 100일이 되는 날 이었습니다. 5월4일에 사모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충남 홍성에 다녀왔읍니다. 얘기만 듣고 찾아 가기는 쉽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동생분 전화번호 송성근 041-632-2275 011-9809-8000 신도비에는 허성욱사이버견지모임의 소개도 있습니다. -송우선생 묘소를 갔다 온 김희철님의 글-
| ||
| ||
| ||
[비석 전면] 송길한 강월옥 큰 아들 송 우 Liberalist Columnist Ghostwriter 1942-2000 조국이 하나될 때 영혼도 기쁘리라 [비석 후면] 부자집으로 시집와서 삼형제를 낳고 홀로 된 어머니밑에서 맏 아들로 자라 대학까지 나온 가슴에는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자유에 대한 열애가 끓고 있었으나 주어진 환경이 항상 통곡의 벽이라 늘 정신적인 한계상황과 걱정과 슬픔속에서 당대에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정치평론과 낚시글과 자서전과 회고록을 인터넷웹사이트를 비롯하여 신문,방송티비,잡지에 발표하며 아내 정명자와 아들 홰와별과 함께 큰 꿈을 꾸며 살다가다. | ||
| ||
[비석 전면] 달님부부 남북분단 생이별비 송길한(宋吉漢) 강월옥(姜月玉) 1942 - 1948 [비석 후면] 부자집 셋째 아들로 태어나 동경유학을 떠났던 송길한은 나라와 겨레를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구하고자 독립운동을하다가 영어의 몸이 되고 달님 강월옥을 맞아 화촉을 밝혔으나 해방후 남북분단사태로 스물다섯 살의 아내와 나이 어린 삼형제를 둔 채 남북으로 생이별하여 어언 반세기가 지나 이제 남편을 그리며 평생을 홀로 살던 달님은 세상을 떠났으니 후일에 위대한 후손이 나타나 이 비운의 한반도를 길이 평화롭고 번영되게하라 | ||
견지낚시大家 史草 宋 祐 先生 記念碑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낚시 거인 오백년 견지낚시 맥을 이은 사람 한국견지낚시클럽,낚시전문가회의,인터넷 허성욱싸이트 매니어들 | ||
|
|
|
위 사진을 제공해 주신 김희철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래 글은 송우선생 추모비를 세우기위해 작년(2000년)에 모금운동을 벌인 결과보고입니다. -송우선생 추모비 건립 성금 모금 결과 보고- 이재일님이 주체가 되어 진행된 성금모금에 정성껏 참여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모금된 성금의 처리결과를 보고드립니다. | ||
| ||
Copyright (c) GYEONJI.COM All rights reserved.
|
KBS-TV 인간극장 그라운 사람 송 우/글 도종우
저번주 성우리조텔에 갔을때 봤던 인간극장의 제목이다.
애석하게 월요일부터 하는 1편-4편까지는 전혀보질 못했다...
단지, 금요일 마지막 5편... 그것도 마지막 10분여를 본것이 전부이다.
내가 이 프로그램을 보고 감동을 받는 건, 이 사람이 우리아버지와 비슷한 병명으로 비슷한 시기를 치료했고, 비슷한 시기를 고통스러워하며, 비슷한 시기에 운명을 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를 보는 듯 했다...
췌장암선고를 받고 처음엔 희망적으로 치료를 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이 프로그램은 그가 죽음에 대한 결과를 받아드리고 취재진을 부르므로, 그로부터 1월 27일 그가 세상을 떠날때까지의 4개월여의 시간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방송에선 1월초를 마지막으로 27일 그가 세상을 떠날때의 기간은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 20일간의 기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방송이 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방송이 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수도 있다.
그저 그나마 마지막 온전한 모습을 시청자들의 뇌리에 남기고 싶어한 작가의 배려라고 생각을 하자
아내와 두 아들 해와 달을 남기고, 죽음을 준비하는 그 힘겨운 모습을 간간히 인터뷰와 함께 이 프로그램에선 모두 담는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와도 닮은 부분도 너무도 많았다.
연말에 가족끼리 케잌을 자르며 파티를 하고, 아버지의 마지막 사진을 남겼을때, 그는 친구들을 불러 마지막 생일을 축하받는다. (무엇을 축하해준다는 건가...)
마지막일꺼라는 생각에 꼭 재야의 종소리는 듣고 싶었고 고통을 참으며 자정을 기다렸으나, 결국 진통제에 취해 그만 잠이들어 버린 것... 1월초,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을 했을땐, 그는 이 프로그램에 그의 마지막 모습을 남기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그의 장례행렬과 함께 마지막 끝맺음의 나레이션을 하고 있다.
죽음에 이르기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초행길'이라는 글을 읽으며 5부작의 드라마는 모두 끝을 맺는다.
------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여보, 미안하오.
차디찬 땅속에 묻힌다.
부디 고통없는 세상으로 가십시오.
당신이 남긴 삶의 절정은 가슴속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흙 한줌이 따뜻한 이불이 되길
아내는 간절히 빈다.
마침내 초행길을 떠났다.
남은 이들도 그 길목에서 삶을 뒤돌아 본다.
그리운 사람 송우.
그가 그렇게 우리곁을 떠났다.
- 초행길 -
누구나 한번은 가야하는 길이다
옛 사람의 눈으로 보면
나는 이 길을 가야할 때가 되었고
오늘의 눈으로 보면
조금은 일찍 가는지 모른다
아내는 너무 빨리 나를 만나
고생이 많았다
해와 별에게는 해 준것이 없다.
모두가 미안한 일이다
사랑하는 아내
귀엽던 아이들
형제들과 친구들
그리고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곁을 떠나
나는 배적삼 삼배바지입고
초행길인 이 고개를 홀로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