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사랑
무봉 김용복
그녀의 소박한 웃음소리에 찔레꽃 나뭇가지 속에 숨은 바람이 흔들리고 떨리는 꽃잎 속 향기가 흩어지면 가슴속에 숨어 있던 첫사랑이 설렘으로 얼굴을 붉혔답니다.
찔레꽃이 무성하던 6월 보리밭에 숨은 바람이 일면 우리의 사랑은 보리밭 고랑에서 춤을 추고 종달새는 우리 옆 둥지에서 알을 낳았습니다.
2011. 6. 10.
뻐꾸기
무봉 김용복
뽕나무에 오디가 익을 때 해질녘 뒷산 뻐꾸기는 짝을 찾아 울었지요.
뻐꾸기 울음 따라 보리피리 꺾어 불 때면 장미꽃 붉게 핀 토담 넘어 그녀 얼굴은 보일 듯 말듯 널을 뛰었답니다.
노을에 비친 그녀 얼굴이 붉게 물들고 애달픈 뻐꾸기소리 짝을 찾느라 슬퍼지는데 행여 오늘도 못 만날까 검은 오디처럼 속이 타 들어 갑니다.
설렘으로 뛰는 가슴 앉고 붉어진 얼굴로 성황당 청실홍실을 둘만이 아는 매듭 묶으며 오늘 만나게 해 달라 신령님께 빌었답니다.
2011. 6. 12.
無題
무봉 김용복
함께 늙어가는 고교 제자와 술 한 잔 하게 되었다.
선생님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질문만하고 살아온 人生 질문을 받으니 당황했다.
제일 가벼운 것이라 ....................... 이보게! 安군 잘 모르겠네.
그게 남자의 거시기랍니다.
왜? 그런가?
선생님 생각만 해도 올라가니까요.
하하하 우린 함께 웃었다.
이보게! 安군 世上에서 제일 무거운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러게요. 선생님 잘 모르겠는데요.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의 거시기일세.
왜요. 선생님!
아무리 생각해도 올라가지 안하니까?
한편 나는 여름날 오후 해를 등지고 서계신 아버지 삼베바지에 비친 가랑이 사이의 거시기가 생각이 났다.
2011.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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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故鄕)
무봉 김용복
아! 고향, 내가 당신 안에 있을 때 부모형제 함께 있어 행복幸福했고 뒷동산에 올라 아름다운 낙조落照를 바라보며 천수만 수평선에 나의 꿈과 사랑을 설계했습니다.
아! 고향, 내가 당신과 함께했던 사춘기思春期 나에게 첫사랑을 주신 당신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릴 때 오월의 아카시아 향이 그녀의 어깨에서 퍼졌습니다.
아! 고향, 내가 당신 곁 떠나 있을 때 함께 못한 부모형제가 그리웠고 초가 안방에서 객지 떠난 아들 위해 등잔불 앞 어머니는 밤을 새워 광목 이불과 베개를 바느질하셨답니다.
아! 고향, 내가 당신 떠나 객지客地에 있을 때 아버지 부음訃音에 눈물로 밟았던 당신에게 하늘같은 아버지를 당신 품에 묻어놓고 불효자 가슴에 한이 되어 아버지와 고향인 당신이 고희古稀를 넘긴 나이에도 그립습니다.
2011.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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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무봉 김용복
빗소리에 눈을 떠 선잠을 깨고 나니 간밤 꿈에 다녀간 그녀의 깊고 슬픈 눈매가 가슴을 파고들어 커다란 구멍을 냈습니다.
이불을 머리에 쓰고 쪼그리고 앉아 아파트 거실 창문을 열어놓고 머릿속의 복잡한 것들을 도려낸 멍청이가 되어 넋 없이 빗줄기를 바라봅니다.
가끔 번쩍이는 섬광에 정신을 차려보지만 나비의 더듬이처럼 움직이는 그녀의 속눈썹 까만 동자를 채운 눈물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랑인줄 알면 서도 행여나 혹시나 하는 기다림으로 장맛비 속으로 꿈길을 찾아 갑니다.
2011. 6. 26.
오늘
무봉 김용복
내게 오늘은 무슨 의미가 있는 날인가? 어제는 방광을 들어낸 친구의 문병을 다녀왔다. 사람의 장기도 오래 쓰면 폐품으로 처리됨이 슬펐다. 많은 생각 속에 어둠이 나를 오늘의 여명에 일으켰다. 알 수 없는 보자기에 싸인 오늘을 열었다. 장마철 비가 갠 새벽 습관처럼 틈새 테니스로 땀을 흘렸다.
내게 오늘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날인가? 오늘 같은 오늘이 얼마나 이어질 것인가? 자꾸만 내가 내게 오늘이 무엇이냐고 물어 본답니다. 나의 젊은 날 꿈의 높이와 깊이가 하늘과 바다 같았습니다. 그래서 겁 없이 생사를 넘나드는 모험을 즐겼습니다. 이제는 탄력을 잃은 스프링처럼 달력 몇 장의 날로 꿈을 꾼답니다.
오늘을 살기위해 9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며 아침을 먹었습니다. 하루 절반을 또 테니스로 오늘에게 제물로 드렸답니다. 인생의 바른 삶의 정답도 오답도 모르는 오늘을 살아갑니다. 내가 그린 아름다운 수채화를 오늘의 화실에 걸어 두고 싶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흐르는 물같이 바람같이 순리로 살고 싶답니다. 지금 아내가 저녁식사 준비하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려 행복합니다.
주머니를 채우려 욕심을 내지 않고 살게 해 주소서. 내일도 오늘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011. 6. 28.
고백
무봉 김용복
살을 섞어 평생을 살면서 여보! 당신을 사랑합니다. 신혼 초에는 자주 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부턴가 사랑한다는 말이 안 됩니다. 분명 사랑하는 마음은 있는데.
여보! 오늘저녁은 나가 먹읍시다. 전화를 걸면, 여보! 그래요. 아내의 음성에서 사랑이 느껴집니다. 하기야 50여년을 밥을 하고 있어 밥하기 싫을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말이요. 어쩌다 아내의 불평을 들으면 다시는 안 살 것처럼 다툼도 많이 하며 살았습니다.
며칠 후면 우리 부부 오랜만에 아주 큰 배를 타고 크루즈 여행을 떠납니다. 지난주에는 여행 때 입을 T셔츠를 사오더니 오늘은 예쁜 슬리퍼를 사왔습니다. 말로는 사랑해요 못해도 이게 우리 부부의 사랑입니다.
여자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좋아한다는데. 난 그걸 못하는 멍청이라오. 내가 떠나고 없는 날 당신을 많이 사랑했음을 글로. "여보! 당신을 사랑합니다." 한 줄 적어 고백합니다.
2011.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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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휘파람
무봉 김용복
불볕더위를 가리려 눌러쓴 밀짚모자 그늘아래 그을린 아버지의 얼굴 골 깊은 주름 타고 구슬땀이 턱으로 모여 떨어질 때 버거운 숨 몰아 휴! - 긴 휘파람 소리가 앞산에 메아리쳤습니다.
등걸이 잠방이 삼베옷에 목에는 땀수건 걸치고 삼복더위에 피사리하는 날 아버지의 손등에 피가 흐르고 구슬땀이 등골을 타고 흐를 때 벅찬 숨 몰아 휴! - 긴 휘파람 소리에 들녘이 출렁거렸습니다.
온종일 들녘에서 날 파리 더위에 시달린 몸 등에 올려놓은 무거운 피로 지게에 짊어진 아버지 해질녘 사립문 열고 들어서며 힘겨운 숨 몰아 휴! - 긴 휘파람 소리는 어둠속으로 살아 졌습니다.
2011. 7. 7. 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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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등
무봉 김용복
온종일 장맛비가 하루를 적셨다. 그래도 아버지는 어깨에 삽을 메고 논으로 우리는 책보자기 어깨에 메고 학교로 도롱이 쓰신 아버지는 들녘에 서서 우리를 보고 삽 흔들어 배웅하고 오른손으로 손 우산 만들어 하늘 가리고 뛰며 아버지를 향해 왼손으로 바람개비처럼 손을 흔들었습니다.
등굣길에 내리는 장맛비는 우리를 적셨다. 그래도 아버지의 손사래 흔들던 모습이 그려져 가슴 속에는 따뜻한 아버지의 사랑이 흘렀습니다. 천둥과 번개가 교실을 흔들면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떠 빗줄기 바라보며 개울건너 집에 갈 걱정에 공부를 못했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나도록 장맛비는 줄기차게 내렸다. 시작종이 울리며 회초리든 담임선생님이 교탁을 때리면 우린 쥐 죽은 듯이 두 손으로 귀 바퀴 만들어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우렸지 "야! 칠득아 조용히 하거라. 오늘은 비가 많이 와서 공부 안하고 집에 간다." 와! - 교실 안은 전쟁터처럼 난장판이 된다. 형과 누나가 교실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책이 젖을까봐 알몸에 책보자기 어깨에 엮어 메고 겉옷을 입었답니다.
장맛비는 오후 하굣길에도 바람 속에 내렸다. 맨 앞에 바람막이로 형이 뛰고 누나는 검정치마 뒤집어쓰고 따라 뛰고 난 형아 허리춤 잡고 달렸습니다. 새탯말 언덕을 넘어 비렁이 거지 들을 지나니 냇물이 불어나 징검다리는 떠내려가 담장도 아닌 가슴이 덜컹하고 무너졌습니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 어두운데 비는 계속 내렸다. 그런데 하늘같은 아버지가 개울건너에서 소리치며 우릴 낮은 곳으로 오라 손짓했습니다. 아버지는 우릴 업어 건너고 안아 옮겼습니다. 어린 나는 아버지 등에 업혀 집으로 갔지요. 지금도 아버지의 따뜻한 등이 그립습니다.
2011. 7. 8.
슬픈 사랑의 추억
무봉 김용복
오늘도 줄기차게 내리는 비를 구경합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빗살무늬 빗줄기가 도막나며 아스팔트에 부딪쳐 고인 물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오래전에 자정 넘어 별이 빛나는 여름밤 가로수가 한 점으로 모이는 신작로를 맞잡은 손끝에 짜릿한 사랑을 즐기며 걸었습니다.
우리의 사랑을 시샘한 조각구름이 모여 하늘의 별을 삼키고 천둥과 번개를 만들었습니다. 섬광속의 아름답던 그녀 눈동자 빛나고 어둠속에 엉킨 우리 사랑은 깊어 갔습니다.
아무도 오가지 않는 신작로 복판의 한 쌍의 조각상 샤워꼭지아래 연인이 되어 소나기로 온몸을 적셨습니다.
한기를 느낀 우린 물방앗간 추녀 밑에서 우리의 사랑을 확인 하듯 그녀는 모래시계 허리로 가슴을 부풀려 밀착시키며 바라보던 그 눈동자를 잊을 수 없습니다.
오늘밤 내 가슴에 내리는 비를 멍청이가 되어 바라봅니다. 아스팔트에 고인 물의 동그라미 속에 한 쌍의 조각상이 자꾸만 부서져 슬픈 사랑은 강물이 되어 흐른답니다.
2011. 7. 9.
딸 딸 딸
무봉 김용복
난 세 딸을 둔 아버지로 섭섭한 적은 없었습니다. 살다 보니 어떨 결에 딸딸이 아버지가 되었다. 아들 오형제 둘째 인 나는 딸이 귀여웠다. 모두들 아들 낳았다고 돌잔치 청첩을 했습니다.
나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단산의 계획을 바꾸어 3년을 정성을 드렸습니다. 셋째도 딸이란 진단을 받았습니다. 날까 말까 고민도 많이 했답니다. 나는 아들을 낳는 기술이 없었나 봅니다. 우리 집에는 여자 넷 속에 나는 홀 남으로 살았습니다.
지금 그 막내딸이 아들을 둔 어미로 중등학교 교사랍니다. 누구를 닮았는지 모두 예쁘고 심성이 착한 딸들입니다. 딸 많은 집 딸 시집보내는데도 흠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큰딸은 아들 둘, 둘째딸은 딸 아들, 막내딸도 아들을 낳았답니다. 내게 아들이 없는 것이 진열장에 없는 상품처럼 아쉽기는 합니다.
시집간 딸들이 아이를 가질 때 쯤 모두 나 사는 아파트 단지에 이사를 했습니다. 모두들 계산된 거주지 이동인줄 알았습니다. 모두 맞벌이 부부로 큰딸 아이를 봐 주어야 했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아내는 둘째 손자는 볼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대로 모두들 아이들을 도우미에게 의지해 키웠습니다. 하지만 급할 때 마무리는 언제나 우리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손자 다섯, 딸 사위 여섯 우리부부 열세명의 대가족이 되었습니다.
넉넉지 못해 유산을 물려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답니다. 그래도 절대 경제적으로 부담을 주지 않는 여생을 보낼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아들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니 아들 때문에 속상해 하는 사람도 많이 봅니다. 이제는 자식에게 여생을 기대는 시대는 지난 것 같습니다. 자식자랑은 팔불출이라 놀리지만 훌륭하게 내조하며 살아가는 딸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방학 다음날 속초에 1박 2일 여름휴가 간답니다. 세 사위는 일이 있어 빠지고 다섯 손자 기사를 내가 맡게 되어 행복합니다. 아내는 막내딸 차에 세 딸과 수다를 떨 설렘으로 입 꼬리가 올라갑니다. 엄마 아빠 함께하는 여행 앞으로 몇 번 있겠느냐 큰딸이 소리치지만 내가 난 딸들의 속을 들여다보며 그 계산에 속아 주기로 했습니다.
난 이번 여행으로 손자들의 가슴에 자상하고 멋있는 외할아버지로 남고 싶답니다.
2011. 7. 10.
건망증
무봉 김용복
현직 시절엔 직장 상사 눈치 보는 일과 가족 부양책임의 스트레스로 머리가 흔들렸다.
이제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아내의 심기를 챙기는 일에 치사한 남자가 되어간다.
삶의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라 생각하지만 서로의 말꼬리 트집이 잦아 우린 대화의 말 수가 점점 줄어든다.
주로 아내가 말을 하면 나는 "옳거니!" 하며 "참 잘했어요." "수고했어요." 장단을 맞춰주어야 편하다.
어쩌다 분위기를 맞추며 "여보! 오늘 달이 밝지요."하면 아내는 "당신이나 싫건 보시구려." 이런 식이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훨씬 편하다.
여자가 나이를 먹으면 남성화 한다지만 나와 결혼해 46년 동안 나에게 당한 섭섭한 일 복수라도 할 것처럼 당당하다.
어쩌다 승용차로 장거리 여행을 가는 날 출발 직전에 약을 챙기지 않았다고 승강기를 오르내린다. 핸드백을 열어 보고 이미 약을 챙긴 것을 잊은 것이다.
오늘 새벽 6시 홈플러스에 절인 배추를 사야한다고 승용차 타고 또 출발 직전에 가스 불을 끄지 않았다고 승강기에 올랐다. 나는 속이 뒤틀리지만 참았다. 돌아와 힘든 한숨을 휴우-- 쉬며 제대로 가스를 껐다고 했다.
그동안 이런 일이 자주 있어 병원에 진단을 받았으나 다행이도 치매 증상은 아니란다.
앞으로 건망증이 심해 나를 보고 "당신 누구요?"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선다. 또 내가 "그런 당신은 누구요?"하면 어쩌나...
그래서 우린 서로 약속을 했다. 서로의 호칭을 명자 씨, 용복 씨로 부르기로. 아내는 살갗에 닭 살 소름이 돋아 못하겠다고, 하지만 내가 "명자 씨!" 하고 부르면 "네!" 하고 대답하며 얼굴을 붉힌다.
처음 만나 신혼 때처럼 사랑의 설렘 속에 여생을 살고 싶다. 2011.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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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는 자존심
무봉 김용복
봄에 씨 뿌리던 농부의 자존심 지금 내리는 빗소리 속에 한숨이 되어 흐른다.
하우스가 허물어지고 제방이 무너져 작물이 수장되고 바람에 떨어지는 낙과들을 보며 귀농의 자존심이 눈물로 녹아내린다.
젊음과 늙음의 차이를 생각한다. 산을 넘고 파도를 헤치는 젊은 날의 꿈으로 농심에 재기의 힘을 주소서.
겨우 고희를 넘긴 나이에 꿈 없이 살아가는 나의 늙음이 삶을 좀먹는다.
식탁에 올려 진 간 갈치 도막 자존심 가시를 찾아 살 옷을 벗겨 자존심의 나체를 접시에 진열해 놓고
나는 스스로 고집을 내려놓고 아집을 수술해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려놓는다.
2011. 7. 13.
천수만의 첫사랑
무봉 김용복
제방에 가로 막힌 천수만 다시 풀어 펼칠 수 있다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달빛 쏟아지는 천수만 모래밭 바람에 갈대 순 바스락대고 발자국 따라 파도가 춤을 추던 해당화 붉게 피는 백사장에서 처음으로 천년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맞잡은 손끝을 타고 흐르는 더운피가 가슴을 설레게 했던 월광의 해변을 잊을 수 없어 오늘 다시 찾아와 보지만 천수만을 흘러 태평양으로 표류하는 나의 첫사랑은 제방에 가슴을 치며 파도로 통곡을 한답니다.
벼이삭 넘실대는 황금 들녘 제방에 갇힌 천수만의 사랑을 눈을 감고 그리다 보면 첫사랑의 사연들이 화선지의 먹물처럼 퍼져갑니다.
담수호에 앙금으로 남은 우리의 사랑 이야기를 철새들이 쪼아 내어 하늘에 울음으로 뿌린답니다. 2011. 9. 24. 성묫길 천수만에서
歲暮(세모)
무봉
고향 뒷마당 곱고 따뜻한 햇볕에 잔설이 녹아내린다. 초가 추녀에 고드름이 자라고 고인 물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동그라미를 그린다. 고드름처럼 차가운 어머니의 손에 쥐여 짠 하얀 광목 빨래가 빨래 줄에서 춤을 춘다.
툇마루에 걸터앉은 소년은 차갑게 시린 파란하늘에서 춤추는 빨래를 바라본다. 조각햇볕에 손발 모아놓고 하늘에 꿈을 그리던 소년이 햇볕에 실려 온 바람에 씻겨 늙어 갔다.
연암 산에 龍(용)이 오르던 날 산고의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소년의 첫 울음에 문풍지도 울고 육십갑자 돌아 열두 해 壬辰龍의 해를 앞에 두고 모진 바람에 씻겨 온 소년은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그 잔설이 눈썹에 걸쳐답니다.
오랜 풍상을 이겨온 대나무는 하늘을 찌르고 굵은 마디는 바람에 피리가 되어 노래를 하는데 歲暮의 언덕에서 부는 바람을 잡아 보는 노인의 빈손에는 그물 같은 손금을 채운다.
하지만 어리석은 노인은 黑龍을 잡겠다고 하늘에 그물을 던져본답니다.
辛卯 年 歲暮
새해 福 많이 받으세요. 2012년 임진 새아침이 밝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사랑하는 임의 가정에 평안과 앞으로 하시고자 뜻하신 모든 일들이 뜻대로 이루어지시기를 기원 합니다. 2012. 1. 1. 무봉 김 용 복 올림
하루 분량의 즐거움을 주시고 일생의 꿈은 그 과정에 기쁨을 주셔서 떠나야 할 곳에서는 빨리 떠나게 하시고 머물러야 할 자리에는 영원히 아름답게 머물게 하소서. 작은 것을 얻든 큰 것을 얻든 만족은 같게 하시고 일상의 소박한 것들에서 많은 감사를 발견하게 하소서.
누구 앞에서나 똑같이 겸손하게 하시고 어디서나 머리를 낮춤으로써 내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하소서. 마음을 가난하게 하여 눈물이 많게 하시고 생각을 빛나게 하여 웃음이 많게 하소서. 기쁨이 있는 곳에 찾아가 함께 기뻐하기보다 슬픔이 있는 곳에 찾아가 같이 슬퍼하게 하소서.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게 하시고 내가 상처 입었을 때는 빨리 치유해 주소서. 이전에 나의 어리석음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었거나 상처 입힌 일이 있으면 나를 괴롭게 하여 빨리 사과하고 용서받도록 하소서.
인내하게 하소서. 인내는 잘못을 참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깨닫게 하고 기다림이 기쁨이 되는 인내이게 하소서. 용기를 주소서. 부끄러움과 부족함을 드러내는 용기를 주시고 용서와 화해를 미루지 않는 용기를 주소서.
투명하게 하소서. 왜곡이나 거짓이나 흐림이 없게 하시고 무엇이 내 마음을 통과할 때 그대로 지나가게 하소서.
그때 무엇인가 덧붙는다면 그것은 사랑이나 이해나 감사나 희망이게 하소서
약속을 조심스럽게 하게 하소서. 그 자리에서 결정하기보다 잠시 미루게 하시고 순간의 감정에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주기로 약속했다면 더 많이 주게 하소서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나에게는 교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음악을 듣게 하시고 햇빛을 좋아하게 하시고 꽃과 나뭇잎의 아름다움에 늘 감탄하게 하소서.
누구의 말이나 귀 기울일 줄 알고 지켜야 할 비밀은 끝까지 지키게 하소서.
훌륭함을 알게 하고 그 훌륭함의 핵심에 접근하게 하소서.
사람을 외모나 학력이나 출신으로 평가하지 않게 하시고 그 사람의 참 가치와 의미와 모습을 빨리 알게 하소서.
사람과의 헤어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되 그 사람의 좋은 점만 기억하게 하소서.
시간을 아끼게 하소서. 하루해가 길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내 앞에 나타날 내일을 설렘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나이가 들어 쇠약하여질 때도 삶을 허무나 후회나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시고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지혜와 너그러움과 부드러움과 안정을 좋아하게 하소서.
삶을 잔잔하게 하소서. 그러나 폭풍이 몰려와도 쓰러지지 않게 하시고 고난을 통해 성숙하게 하소서.
그리고 그 이후에 오는 잔잔함을 새롭게 감사하고 이전보다 더 깊은 평안을 누리도록 하소서.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고 햇살이 좋은 날은 며칠쯤 그 계절을 완전히 그리고 색다르게 느끼게 하소서.
가족에 대한 사랑 가정의 기쁨을 늘 가슴에 품게 하시고 이런 마음을 전할 기회를 자주 허락하소서.
건강을 주소서. 그러나 내 삶과 생각이 건강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소서
일하는 동안에는 열정이 식지 않게 하시고 열정이 식어 갈 때는 다음 사람에게 일을 넘겨주고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질서를 지키고 원칙과 기준이 확실하며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도록 하시고 성공한 사람보다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언제 어디서나 사랑만큼 쉬운 길이 없고 사랑만큼 아름다운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늘 그 길을 택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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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무봉 김 용 복
어머니는 언제나 항아리 옆에 계셨다. 별이 총총한 밤 정화수에 담긴 어머니 얼굴이 항아리 뚜껑에 놓인 촛불에 흔들렸지.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두 손 비벼 빌던 어머니가 보고 싶다.
어머니는 언제나 항아리 옆에 계셨다. 따뜻한 봄날 오후 장독대 밑에 앉아 인절미 콩가루에 찬밥 비벼먹던 나를 바라보며 항아리 닦으며 웃던 어머니의 미소가 그립다.
어머니는 언제나 항아리 옆에 계셨다. 항아리 같은 어머니 뱃속에 막내 동생 자랄 때 눈깔사탕 달라고 졸라대던 우리에게 키 보다 큰 항아리 속에 숨겨둔 알사탕 주시던 어머니.
어머니는 언제나 항아리 옆에 계셨다. 하굣길 목이 말라 헐레벌떡 물을 달라면 응달진 부뚜막 옆 항아리에서 물 한 바가지 퍼주시던 어머니 이마에 땀, 젖은 손으로 훔치시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머니는 언제나 항아리 옆에 계셨다. 사네 안사네 아버지와 큰소리치며 다투던 날이면 어머니는 언제나 장독대 항아리 뒤에 숨어 소리 없이 어깨 들썩이며 흐느끼던 어머니가 그려진다.
2012. 1. 3.
이렇게 사는 것도
무봉 김 용 복
영하 8,9도 차가운 새벽 땀으로 적셔 운동을 했다면 누가 믿을까? 하지만 나는 매일 미친 사람처럼 즐거워 테니스를 한답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70이 넘은 나이에 과격하다고 걱정을 합니다. 40여년을 이렇게 살아 왔기에 아직은 건강하다는 믿음을 갖게 한답니다. 이렇게 사는 것도 큰 축복이라 감사합니다.
아내가 차려 놓고 나간 아침밥상을 홀로 먹고 차 한 잔에 큼직한 대봉홍시 수저로 먹으며 법정 스님의 무소유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아파트 창가를 타고 들어 온 햇살이 거실 절반에 자리를 펴고 누울 때면 화분을 밟고 일어선 화초들이 솜털을 세우고 군자란이 까치발로 깃을 올려 햇볕을 잡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도 큰 행복이라 감사합니다.
양말 벗은 맨발 위에 쏟아지는 햇볕 온기를 느낄 수 없지만 나 혼자 있는 거실 공간에 비친 햇살이 흐트러지고 혼란한 나의 마음을 빗질 합니다. 하늘에 떠도는 구름같이 자연스럽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겸손하게 풀잎의 이슬처럼 살다가 조용히 떠나고 싶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도 주님의 뜻이라 감사하면서.
2012. 1. 6.
자작나무 숲에 부는 바람
무봉 김용복
앙상한 가지만 남은 자작나무 숲에서 얇은 유리 얼음으로 덮어 버린 코발트 하늘을 보니 코끝에 스치는 상큼한 냉기가 기도를 자극한다.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 부는 칼바람이 자작나무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하얀 비늘이 되어 가지에 남은 잔설과 함께 하늘에 흩어진다.
자작나무 숲에 부는 바람 속에 사냥꾼에게 쫒기는 승냥이의 울음소리가 황량한 설원 저쪽에서 태고의 전설이 되어 들려온다.
언젠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30리 자작나무 숲을 달리며 부르던 우리의 연가소리가 자작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바람이 되어 들려온다.
자작나무 숲의 추억이 그리워 찾아오지만 첫사랑의 연가 소리는 이명증 환자처럼 바람소리만 윙윙 자작나무 가지를 스치는 바람은 텅 빈 가슴을 설레게 한다.
2012. 1. 7.
설날
무봉 김 용 복
설날 지금은 나에게 서러운 날 몇 개가 남았는지 모를 나이 곶감 빼어 먹는 것 같은 허전함을 흩어진 형제와 떠나신 부모님 생각으로 메운다.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5일 대목장에서 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리던 우린 저녁노을 등에 지고 목이 길어진 그림자만큼 선물꾸러미가 궁금해 까치발 세워 목을 늘렸지.
오형제 발 크기를 지푸라기로 잘라 가신 아버지 저 멀리 고갯길 넘어오시는 아버지 낮술의 흥에 겨워 비틀비틀 지게에 매달린 검정고무신 흔들흔들
대청마루에는 설날 입을 옷 바지저고리 조끼 버선 댓님 키순으로 놓이고 아버지가 사온 검정 고무신 오형제 그믐 날 새워 설날 기다리다 등잔 그름으로 아궁이처럼 콧구멍이 까맣게 그슬렸지.
해질녘 굴뚝 연기가 하늘에 머리 풀고 가마솥 시루떡 익는 김 서린 부엌의 떡 냄새 초가추녀 밑을 돌아 문풍지 따라 방에 들면 허기진 배가 꼬르륵 군침은 목젖을 넘는다.
다시는 오지 않는 고향의 어린 시절 아주 멀고 먼 지난 세월의 강 저편을 그리며 이 글을 읽는 손자들에게 할아버지의 마음을 전한다.
2012.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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