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사진 일기

2019. 8. 9. 사진 일기(문화재단 방문, 오전 문학인의 집 방문, 안시회 모임, 저녁 문학인의 집 근무)

무봉 김도성 2019. 8. 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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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경기 수원시 장안구(현재접속지역) 읍·면

이른 아침 5시 30분에 일어 났다.

아내가 먹을 아침 상을 차렸다.

카레라이스를 데웠다.

며칠전에 사다 말린 가지를 솥에 쪄서 무침을 했다.

배추 얼갈이 김치와 잘 익은 열무김치면 그런대로 아침상이 되었다.

큰 돈벌이 나가는 사람처럼 나 먼저 아침을 챙겨 먹고 테니스 코트에 나갔다.

오늘은 학교운동장에 등교하는 학생들처럼  7시경에 테니스 3면 12명이 꽉찼다.

젊은 회원들과 어울려 전신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땀에 젖은 몸을 샤워 한 후 옷을 갈아 입고 9시경 문화재단에 갔다.

마지막 창작지원금 정산 서류를 제출했다.

문화 재단을 나와 문학인의 집에 들렸다.

시간이 9시 20분 인데 잠시후 오늘 근무조 이도행 소설가가 왔다.

잠시 대화후 나는 집으로 왔다.

10시 30분경 사당동 안시회 모임이있어 집을 나섰다.

11시 20분경 약속장송인 사당역 속초어시장 식당에 갔다.

오늘은 6명중 5명이 참석했다.

생선회 점심식사후 3시경 집에 왔다.

집에 오자마자 안시회비 현금출납상황을 메시지로 회원들에게 보냈다.

다음 모임은 9월은 추석날과 겹쳐 10월 11일 사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집에 와 보니 어제 주문한 법성포 조기가 도착했다.

오늘 저녁상에 조기를 구워야 겠다.

오늘 밥 8시부터 11시까지 문학인의 집 근무조이다.

5시 30분 집을 나서 6시경 문집에 갔다.

오늘 근무조였던 임화자 임성자 이사가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양승본회장을 모시고 4명이 칼국수를 먹고 밥값은 내가 계산했다.

양회장이 일찍 집으로 가라해서 집에 오자 잠시 쉬었다가 아내 저녁 운동을 해 주었다.

제주도 다녀온 임화자 이사가 제주 오메기 떡 두개를 챙겨 주며 아내에게 주라 했다.

그 정성과 사라에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또 황남희 차장이 메론과 포도를 챙겼다 약소하지만 받아 달라고해 괌웠다.

내가 아내 간병하며 밥해 먹고 살고 있는 형편을 시인들이 알고 있어 이것 저것 챙겨준다.








인터넷신문 포켓프레스 향기나는 시(2019. 8. 8)


민들레는 달빛에 반사되어 늦은 밤의 씨를 가진 씨방을 위하여 목숨 걸기 일쑤다 코밑에 뽀송한 사춘기 솜털마저 솔깃해질 무렵, 들녘에 알곡 익는 소리가 뒤주 안에서 들려왔다 농사일에 지친 한숨과 해수 끓는 소리가 생솔가지 타는 연기 하늘에 꼬물거리던 밤

단칸방 아랫목엔 네 형제가 굴비 엮이듯 잠들었다

그날따라, 근력의 아버지는 또 한 번 호미질로 야간 경작을 하셨을까 맞다, 다섯째 막내가 어미 밭에서 출토되었다 다리 밑에서 주워 온 놈치고 실하게 생긴 ‘바로 그 놈’,

등잔불이 가물가물 이부자리 들썩 들썩 갓 뽑은 무청처럼 아버지의 그 밤은 몹시 푸르둥둥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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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성(金都星)시인 약력]

충남 서산 출생. 월간 <한비문학> 신인상 등단.

수원문인협회 수석부회장, 한국문인협회회원, 계간문예이사, 담쟁이문학회자문위원.

녹조근정훈장포장, 한국문인협회이사장표창, 홍재문학상 수상, 한반도미술협회 서각 초대작가.

시집 “아내를 품은 바다.” “아내의 하늘” “아내의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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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켓프레스(http://www.pocketpress.co.kr)

























2019/08/09(금) 이 중에 절로 난 몸이 (466)

 

이 중에 절로 난 몸이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그 중에 절로절로 자란 몸이 늙기조차 절로하리

 

조선조 주자학의 대가였던 송시열이 읊은 시조 한 수이다. “늙기조차 절로하리라는 한 마디는 모든 노인들의 꿈이라고 할 수 있다. 나도 그렇다.

 

70회 생일을 맞았을 때 나는 이제부터는 과외의 생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7080대도 비교적 건강하게 보냈다. 그러나 90세가 넘으면서 오래 산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매우 괴로운 일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90세가 되기까지는 팔다리의 힘은 많이 빠졌지만 눈은 잘 보이고, 귀도 잘 듣고, 임플란트는 몇 개 해 넣기는 했지만 아직도 씹는 일에 지장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발가락에 화상을 입고 나서는 건강이 여간 위축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팔을 붙잡지 않고는 10분도 걷기 어렵고 갈 길이 멀면 휠체어를 탈 수밖에 없다. 발가락은 거의 다 치유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간호사가 집에 와서 치료를 해 주어야 하는 신세이다.

 

송시열의 인생에 어느 때 이 시를 읊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80세가 넘어 산수간에 나도 절로라고 할 수 있었다면 그는 나보다도 훨씬 건강한 사람이었겠다. “늙기조차 절로하리라고 한 마디 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인 나는 칠십 리 강행군도 하고, 설악산 대청봉에도 오르던 그날들을 회상하며 그리워하는 한심한 노인이 되어 노쇠 현상을 참으며 힘겨운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그것이 나의 고백이다.

 

김동길

Kimdonggill.com




                     


그리움 / 나태주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있다 만나지 말자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하지 말라면

더욱 해 보고 싶은 일이있다.


그것이 인생이고 그리움

바로 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