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작시 원고

국기경례

무봉 김도성 2019. 2. 8. 15:59



 





3.1 운동 100주 년을 앞에 두고 요즘 국기에 대한 경례나 기념일 게양을 소홀함이 걱정된다. 
오는 3.1 절에는 태극기를 게양하자는 운동으로 9년전 조선일보에 투고 했던 기사를 올려 본다.

              나와 6.25 조선일보 기사
              2010. 4. 23. 조선일보 6면

              ▲ 김도성(70·경기도 수원시 거주)

                내 고향은 충남 서산시 고북면. 유엔군이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되찾은 직후
                우리 마을에도 국군이 북한군 잔당을 소탕하러 진격해 왔다.
                하지만 국군 탱크는 면 소재지 남쪽 언덕에 머무른 채 공포(空砲)만 쏘아대고 있었다.
                마을에 인공기가 걸려 있는 탓에 아직 북한군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워
                섣불리 내려오지 못한 것이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9월 30일이었던 것 같다.
                새벽녘에 "팡"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밖에 나가보니 6척 장신(長身)의
                스님 한 분이 오른손에 사제(私製) 권총을 들고 늠름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인근 고찰(古刹)인 연암산 천장암(天藏庵)의 주지였다.
                스님은 면사무소에 걸린 북한 면당위원회 간판을 주먹으로
                일격(一擊)해서 떼어낸 후 우물에 처박아버렸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영웅호걸의 무공을 보는 듯했다.
                이어 스님은 바로 옆 주재소(경찰지서) 국기게양대에 걸린 인공기를 내려
                발기발기 찢어버린 뒤 허리춤에서 태극기를 꺼내 최대한 높게 게양했다.
                '신호'가 올라가자 그제야 국군 탱크는 마을로 내려왔다.

                국군을 본 마을 사람들은 통곡을 했다.
                "하루만 먼저 오지 그랬소. 그러면 우리 아들이, 우리 남편이 죽지 않았을 텐데…."

                바로 전날 밤 북한군은 임시 감옥으로 사용하던 소방대 창고에
                불을 질러 가둬두었던 공무원과 지주(地主)들을 죽였다.
                태극기가 하루만 더 일찍 올라갔더라도 여러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스님에게 왜 그런 활약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소방대 창고에서 죽어가는 사람 목숨을 하나라도 더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다들 생각했다.
                커서 교사가 된 나는 학생들에게 스님과 태극기 이야기를 수십년간 해왔다.
                60년이 지났지만 스님의 통쾌한 몸동작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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