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11. 사진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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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경기 수원시 장안구(현재접속지역) 읍·면
어제 문학기행 다녀온 사진을 정리해 카페에 올리느라 12시 넘어 잠들었다.
오늘 새벽 5시 기상하여 밥을 짓고 상해에서 귀국한 큰딸 회사출근하는 것을 챙겼다.
작은 손자는 늦잠을 자고 있다.
아내가 먹을 아침밥상을 차려 놓고 나는 생식으로 식사후 테니스 코트에 나갔다.
젊ㅇ느 회원들과 어울려 한셑 경기를 마치고 집으로 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자동차를 세차했다.
1박 2일 여행 피로가 몰려 왔다.
점심 식사후 오후 4시까지 낮잠을 잤다.
토요일 상해에서 귀국한 딸 두째 손자가 당분간 함께 지내게 되었다.
큰 딸은 아침에 회사로 출근했다.
손자와 아내를 데리고 근처 석기정 식당에서 부대찌개로 저녁 식사를 했다.
피곤하지만 7시 30분경 테니스 코트에 도착해 운동을 했다.
◆100년의 사람들 -김동길의 인물에세이- (60) 조용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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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장막이 그대로 존재하던 시절에는 유전이냐 환경이냐 하는 논쟁이 매우 뜨거웠던 것이 사실이다. 쉬운 말로 풀이하자면 ‘비범한 사람들은 태어나는 것이냐 아니면 만들어지는 것이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은 그 두 가지가 다 갖추어져야 비범한 인간이 역사에 남게 된다는 판단이 가장 공평한 것 같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보통 사람들과는 엄청나게 다른 손금을 타고나는 사람이 천만 명에 한 사람은 될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되는데 물론 사람마다 그 다섯 사람의 명단이 다 다를 수는 있겠지만 나름대로 그 다섯 사람을 내가 거명 한다면 이승만, 김일성, 박정희, 문선명 그리고 조용기이다.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이승만이 없었으면 대한민국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박정희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한국인들이 아직 많이 있기는 하지만 이 나라의 농촌을 저만큼 살기 좋게 만들어 우리가 사용하는 낱말에 ‘보릿고개’라는 한 마디가 사라지게 된 배후에는 박정희의 공이 크다는 사실을 부인 할 수는 없다. 문선명과 조용기는 서양에서 온 전도자들로 부터 전수받은 기독교라는 복음을 깔고 세계적인 인물들이 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김일성의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가 없었으면 북의 인민 공화국은 수립되지 못 하였을 것이다.
조용기는 1936년 경상남도 울산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조두천과 그의 어머니 김복선은 아들 다섯과 딸 넷을 나았는데 맏아들인 조용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폐결핵에 걸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도 않아 부산까지 가서 통원 치료를 받으며 여러해 고생하다가 상경하여 순복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거기서 만난 김성혜와 1965년 결혼하여 아들 셋을 두었는데 그가 결혼 한 여성이 최자실목사의 딸이었다. 그 사실이 그의 삶의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는 20 살 때 대조동의 천막촌에서 최자실과 공동으로 목회를 시작하여 그는 마침내 78만명의 교인을 가진 세계 최대의 개신교 교회를 건설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서울 여의도에 거창한 교회를 세우고 그가 이끄는 순복음교회는 전국 방방곡곡에 널려 있다. 그에게는 다른 전도자들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고 한때 병을 고치는 은사도 넘치게 받아서 그의 안수로 질병이 치유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들었다. 그의 설교는 우리들이 들었을 적에는 보통 설교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데 그를 따르는 교인들의 귀에는 베드로나 바울의 설교처럼 기적에 가까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그의 말투에는 신들린 사람 같은 면이 없지 않고 같은 설교라도 조용기가 할 때만 은혜가 넘친다고 하였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주장한 ‘삼박자 축복’은 기성교회의 지도자들의 큰 반발을 샀고 이단이라는 비난 속에 한 때는 고생도 많이 하였지만 교인은 날마다 늘어났고 헌금은 산더미처럼 모여서 가장 경제력이 막강한 교회로 군림하여 순복음교회 때문에 여의도에는 일요일에 문을 열어야 하는 은행이 있었다고 들었다. 기성교회에 의하여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순복음은 조용기의 설교나 그의 행동거지에 타협의 기세가 보임에 따라 차차 핍박이 완화된 것이 사실인데 그런 추세와 더불어 조용기의 ‘신유’의 능력도 점차 감소된 것으로 풀이된다. 어느 교인의 어린 딸이 갑자기 걷지 못하게 되는 이상한 질병에 걸려 그 아버지가 조 용기를 찾아가 그런 사정을 얘기하면서 안수기도를 요청했지만 그는 오히려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제가 기도 하는 것보다는 그 딸을 가장 사랑하는 아버님의 기도가 더 큰 효과가 있을 겁니다”라고 정중하게 사양한 것을 볼 때 그 것이 그의 영적 능력이 감소된 증거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조용기에게는 점차 세속적인 고민이 커지게 되었다. 전도 사업은 크게 성공했건만 아들들은 아버지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고 멋대로 놀아나니 그들은 호화스러운 살림에 도취하고 미녀들만 골라서 사귀는 탕자처럼 되어 조용기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조용기 자신도 책을 쓰면 큰 돈을 벌게 되고 그에 막강한 교세는 그로 하여금 세속적인 유혹을 물리치기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서양 중세의 시성이라고 일컫는 단테는 칠십 인생의 중도에서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고 자백한 적 있는데 조용기는 칠십이 되어 “나는 나이 칠십이 되어 마음에 원하는 대로 행동해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이 없다”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을 비웃듯이 그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 29명의 이름으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 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목사가 당회장 시절 교회 돈을 가져다가 장남 조희준의 주식투자에 200억 원 이상을 사용했다고 고발한 것이었다. 조용기 본인이 부정하고 있으니 조용기의 말을 믿고 싶지만 그에게는 내연의 여자 있었다는 소문도 파다하여 그의 ‘삼박자 축복’은 이제 허무한 꿈이 되고 말았으니 예수를 믿으면 모든 일이 잘 되고 건강에 축복을 받으며 영원히 잘 된다는 그의 약속을 누가 과연 믿을 수 있겠는가! 왜 그는 미국의 빌리그래함처럼 끝까지 교인들과 모든 국민의 존경을 받는 성직자가 되지 못하였을까! 제대로 학교에 다녀 본 적도 없으면서 영어로 설교도 하고 일본 말로 복음도 전할 수 있다는 그를 어찌 보통 사람이라 하겠는가! 나는 그의 손금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그 손금에 어울리는 한국인 전도자로 생을 마감하기는 어렵게 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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