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봉 김도성 2018. 11. 22. 17:36

상처

 

                                          김도성

 

10살에 우측 다리를 다쳐 골수염으로 고생을 했다.

썩은 뼈를 긁어내는 수술을 3년 동안에 세 번이나 했다.

6.25 전쟁 중이라 전문 수술 의사나 약이 없어 마취 없이 수술을 했다.

목수들이 쓰는 끌과 나무망치로 두들겨 골수가 들어 나도록 뼈를 깎아 냈다.

그렇게 수술했건만 어린 아가 손톱 크기의 정강이뼈가 보이고 진물이 흘러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자동차도 전기도 없던 시골에서 자란 나는 핏기 없는 얼굴의 소년으로 살았다.

항상 상처를 소독한 후 거제를 붙이고 살았다.

관절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남들은 알지 못하는 나만의 고민이었다.

 

9.28 수복 후 홍성 도립병원이 개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네 젊은 장정들 네 명이 메고 가는 가마에 실려 50리 홍성도립병원으로 새벽길을 떠났다.

가마 타고 가는 새벽길 들판에는 메밀꽃이 싸락눈이 내린 것처럼 하얗다.

자갈이 구르는 신작로를 가는가 하면 때로는 지름길을 가느라 산을 넘어야 했다.

바닷물 빛 같은 코발트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깔렸고

가끔 별똥별이 사선을 그으면 지나갔다.

마치 앉은뱅이가 예수님이 병자를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희망을 안고 찾아가듯이 기도를 했다.

가끔 엽연초 태우는 담배연기 속에 아버지의 해수 소리가 힘들게 들렸다.

장정들의 힘겨운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새벽길을 따라왔다.

가마 문밖으로 내민 손가락 끝에 걸리는 나뭇잎과 풀머리가 스쳤다.

힘든 장정들이 중간중간에 가마를 내려놓고 담배를 피워댔다.

새벽 2시 출발한 50 리 새벽길 홍성시내가 보이는 언덕에 오를 때 동편이 붉게 물들었다.

열 살 6.25 전쟁은 어린 나를 힘들게 했다.

 

장항선 홍성 역 부근 홍성 도립병원에 오전 10시경에 도착했다.

담당의사가 내 얼굴과 상처를 번갈아 보며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다고 했다.

오전에 담당의사가 X-Ray 촬영도 하고 각종 검사를 했다.

지금의 의학으로는 골수염은 치료가 안 되어 무릎 아래를 절단하는 길 밖에 없다고 했다.

만약 절단하지 않으면 골수염이 깊어져 무릎과 대퇴부 골반이 썩어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고양이에게 쫓겨 다니다 구석에 몰린 쥐새끼 신세였다.

새벽길을 나서 7시간 동안 걸어온 길의 피로는 더더욱 좌절과 절망으로 무게를 더했다.

언제나 환자는 의사 앞에서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살길이라 생각을 갖게 했다.

방법이 없는 아버지도 그대로 두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하니 도리 없이 나를 설득했다.

하는 수 없이 수술 각서에 아버지와 나는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었다.

 

오후 4시경 수술하기로 했다.

교실 크기의 수술실 내부는 하얗게 칠을 했다.

높다란 천정에서 수술대 바로 위까지 내려온 촉수 높은 여러 개의 전구가 대낮같이 밝았다.

발가벗은 알몸으로 수술실 중앙의 수술대에 누웠다.

수술대 옆에는 다리를 절단하는 전기톱이 보였다.

하얀 마스크에 하얀 옷을 입고 검은 장화를 신은 여러 명의 의사와 간호사가 수술도구를 챙겼다.

하얀 천으로 나를 덮고 절단하려는 우측 다리만 내놓았다.

이제 마취 후 잠이 들면 순식간에 다리가 잘릴 시간이다.

간호사가 옆에 있던 아버지를 수수 실 밖으로 내 보냈다.

그때 나를 잡았던 아버지의 떨리는 손의 전율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뒷걸음으로 문에 기대고 서 있다가 순간 등이 보인 아버지의 등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보다 오래 살고 있는 자식 그때의 아버지 가슴에 피가 선지 덩어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서 떠나 올 때 대문 밖에서 서성이던 어머니

누나와 형이 잘 다녀오라 배웅하던 얼굴들이 슬프게 그려졌다.

골목길에서 부르는 마을 친구들의 얼굴이 수술실 창밖으로 떠 다녔다.

목발로 절뚝이며 살아가는 건너 마을 상이군인 삼식이 아저씨처럼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실의 빠져 매일 술에 취한 주정뱅이가 떠올랐다.

 

어린 나이이지만 도저히 다리를 절단하고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다리의 골수염이 깊어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당장 걸어 다니는 데는 큰 지장이 없지 않은가?

주변의 어느 누구와도 의논할 사람이 없어 나 혼자 중얼거렸다.

간호사가 주사기에 마취약을 주입해 의사에게 전달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순간이다.

나는 간호사에게 아버지를 불러 달라했다.

간호사가 말을 전하겠다고 했으나 나는 단호하게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가 깜짝 놀란 얼굴로 수술실에 들어오셨다.

애야 왜 불렀어.”

아버지가 내 손을 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어.”

오냐 사랑한다. 아들아.”

아버지의 눈가가 젖었다.

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 우리 아들 착하지.”

아버지! 부탁이 있어.”

그래 아들 말해봐.”

오줌 누고 수술하면 안 돼.”

……

그래 다녀오너라.”

옆에서 듣고 있던 간호사가 말했다.

문 열고 오른쪽으로 나가면 복도 끝에 화장실이 있어.”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 발판에 올라 참았던 소변을 보았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 하늘이 노을로 붉게 물이 들었다.

장항선을 달리는 기차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화장실 우측에 밖으로 나가는 문이 열려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없었다.

! 뭐해 이놈아! 도망가 어서.’

나는 이때다 싶어 뒤도 보지 않고 밖으로 뛰었다.

아무도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철길이 보였다.

무조건 철길 따라 달렸다.

주변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래도 어딘지 모르는 생전 처음 보는 철길을 달리고 달렸다.

얼마를 달렸을까 병원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아마 30분 이상 달렸을 것 같았다.

철길 둑에 앉아 울었다.

죽으면 죽었지 수술을 않겠다고 다짐했다.

 

얼마 후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함께 온 가마꾼들도 달려왔다.

엎드려 울고 있는 나를 아버지가 끌어안고 아버지도 우셨다.

아버지! 나 수술 안 할래.”

아들아 그래 그냥 집에 가자.”

아버지가 나를 등에 업었다.

아들아 미안하다.”

……

아버지가 배우지 못한 게 죄다.”

 

6.25 전쟁 때 나의 고향에는 남로당의 사주를 받아 숨어 지내던 공산당원들이

면사무소와 지서를 점령했다.

같은 성씨가 살고 있는 마을 전체가 모두 공산당으로 면당 위원장(면장)을 했다.

지역 치안은 한두 명의 인민군이 총을 메고 밤낮없이 공무원 대지주를 잡아들였다.

초등학교 교실에는 인공기(인민공화국 국기)와 김일성 초상화를 걸었다.

매일 학교나 마을 느티나무 아래에서 김일성 주체사상교육을 학습했다.

밤마다 마을 느티나무 아래에서 인민재판이 이루어져 많은 사람이 학살되었다.

인민은 누구나 평등합니다.”

우린 대지주들에게 속박받는 인민 여러분들(소작인)을 해방시키려 왔습니다.”

대지주의 땅을 몰수하여 소작인 여러분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줄 겁니다.”

대대로 원한에 싸여 살던 소작인의 가슴에 복수의 불을 붙였다.

지금부터 지주와 숨어 있는 공무원 경찰을 색출해 인민재판에 붙입시다.”

소작인의 젊은 아들과 딸들이 사상과는 무관하게 조상 대대로 원수를 갚는 일로 피를 보았다.

쇠스랑 낫 괭이 도끼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서로 얼굴과 속사정을 잘 알고 지내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3개월 후 9.28 서울이 수복되면서 북상을 못한 인민군들이 마지막으로 소방대 창고에 구금한

우익을 불을 질러 산채로 태워 죽였다.

미처 북상을 못한 인민군과 남로당 패거리가 지리산 빨갱이로 숨어들었다.

서울 수복 후 930일로 기억된다.

면사무소 담장과 나란히 국도변에 살았다.

새벽에 소재지 남쪽 언덕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숨어서 보니 탱크 한 대와 찦 한대 GMC 한 대에 군인들이 타고 공포를 쏘았다.

지서 국기 게양대에 인민군기가 펄럭였다.

아직 인민군 잔당들이 있을 것으로 판단되어 공포를 쏘았다.

면사무소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담장 넘어 들여다보니 6척 장신의 천정 암 주지 스님이

회색 승복을 날리며 뛰어다녔다.

오른손에는 권총을 들고 왼손으로 면당 위원회 간판을 일격 해 떨어진

간판을 면사무소 우물에 처박았다.

나는 겁도 없이 잘 알고 있는 스님에게 달려가 왜 간판을 떼느냐 물었다.

스님은 대답도 없이 큰일이 구나 하며 너의 집에 혹시 태극기 있으면 빨리 가져 오라 했다.

6.25가 터지며 아버지가 골방 궤짝에 숨겨둔 태극기가 생각이 났다.

착하구나! 너는 집으로 가라 하며 태극기를 허리춤에 찼다.

급히 지서(지금의 파출소) 사이렌 대에 올라갔다.

인민군 기를 내려 발로 발기발기 찢어 버리고 허리춤에서 태극기를 꺼내 서서히 게양을 했다.

그제야 안심이 되던지 군인들이 서서히 면소재지에 입성을 했다.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환영을 했다.

하루만 먼저 왔으면 우리 아들딸이 남편이 죽지 않았을 터인데 하며 군인들을 붙잡고 통곡을 했다.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던 국군이 북상하면서 고향에 들린 지주 아들이

아버지가 소작인 아들 머슴에게 비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고 무장한 군인들이 무차별로 총살했다.

9.28 수복 후 보복으로 소작인의 가족들이 아녀자와 아이들만 남겨 두고 많이 죽었다.

자녀를 키우며 어머니가 어린 자식에게 너의 아버지 원수가

건너 마을 누구네 집이니 기억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또 세상이 바뀌면 동족 간의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상관없는 자식들이 죽을 것이다.

 

수복 후 거의 매일 경찰들이 좌익분자들을 색출해 뒷산에 처형했다.

어린 나는 무서운 것도 모르고 친구들과 사형장에서 시체들 사이에 떨어진 탄피를 주었다.

장난감 총을 만들어 전쟁놀이도 하고 참새 토끼 꿩 사냥을 즐겼다.

어느 날 사형장 멀리에서 숨어서 총살 현장을 보는데 경찰이 오지 말라고

공포를 쏘는데 놀라 도망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다음날 아침 오른쪽 다리가 아파 걸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머슴을 시켜 초록리에 살고 있는 침쟁이를 불렀다.

침쟁이가 살펴보더니 부러졌다며 미루나무를 윷가락으로 깎아

우측 정강이에 대고 무명 끈으로 묶었다.

학교도 가지 못하고 1개월 후 해미읍 보건소에 가서 무명을 끌러보니 노란 풍선같이 고름이 잡혔다.

X-Ray 사진 상에는 골절된 부분이 없었다.

그때 깊어진 염증이 불치의 골수염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신이 나를 곤궁으로 몰았다.

무식한 침쟁이의 처방 피가 통하지 않도록 무명 끈으로 묶어둔 무식과

전쟁으로 병원을 갈 수 없던 사회 상황과 제대로 배우지 못한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돌부리에 무릎을 찌어 다친 것을 며칠만 참았으면 자연히 낳을 것을 어쩔 수 없는 나의 운명이었다.

 

철길에서 나를 업고 걸으면서 하신 말씀을 배우지 못한 게 죄다.” 잊을 수가 없다.

6.25 전쟁 정전 후 사회가 안정되면서부터 서울대학 병원에서 최종 수술로 완치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 후 뜻을 같이하는 선배들과 고향에서 가정형편으로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후배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준 천막학교 시작으로 평생 교육의 길 걸었다.

그 고생했던 다리로 46년 동안 매일 테니스를 하고 있다.

그 아픈 상처가 나의 스승이다.

 

2018. 11. 22.

 


    



 

 

 

동행 2

 

김도성

 

중풍의 아내와 밤마다 걷는다

뒤 따라가다 보면 불안하다

다리 하나 없는 개다리소반에

올려놓은 꽃병이다

 

바람이 분다

낙엽이 진다

잎을 떨구는 나무도 슬프겠다며

내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손을 언제 놓을지 몰라

아주 멀리 반짝이는 별을 본다

젊은 날의 청춘스타가

타계했다는 뉴스다

 

2018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