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18. 사진 일기(큰 딸 상하이로 출국, 아내와 함께 영화 출국을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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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테니스대회 호주 오픈 바브리카 우승 장면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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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15. 김용복 이준찬/장대원 박승혜 테니스 경기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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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큰 딸이 이틀 간 집에 있는 도안 묵은 빨래를 정리해 세탁을 했다.
큰 딸이 몸살감기까지 겹쳐 무척 힘들어 했다.
딸의 모습을 보는 아내도 가슴이 아픈가 보다.
이른 아침을 챙겨 먹고 테니스 코트 가는 길에 딸을 공항버스 장에서 배웅했다.
아내가 걱정이 되는 큰 딸보고 정신 또가로 차려 잘가라고 전화를 했다.
딸들이 집근처에 살면 좋겠다고 아내가 자주 이야기 했다.
테니스 코트에 도착해 보니 오늘 수원시 테니스 대회 클럽대항 출전준비하느라 선수들이 일찍 왔다.
출전하지 않는 회원들과 어울려 겨우 한 경기후 집으로 왔다.
"출국" 이라는 영화가 보고 싶었다.
아내 아침 운동을 산책하며 극장가자 했더니 좋아 했다.
12시부터 출국 여화가 상영이 된다고하여 예매를 했다.
집에서 간단히 라면으로 점심 식사를 한 후 12시경 극장에 갔다.
아내와 5년만에 영화 관람이다.
아내가 즐겁게 영화를 보았다며 오늘하루 덜 지루게 갈것 같다며 고맙다고했다.
3시경 집에 오자마자 피곤하여 잠시 낮잠에 들었다.
5시경 잠에서 깨어 저녁식사를 준비 해 아내와 함께 겸상을 했다.
저녁 7시경 아내를 데리고 아파트 산책 운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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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내와 함 영화 "출국"을 감상했다.
-감상후기-
가족의 이산의 아픔이 가슴을 가슴을 도려내게 했다.
남자 주인공 오영민 잠시 북한 공작원으로 활동했지만 북한의 실상을 알고 나서 서독에 망명을 한다.
동독에 거주 중인 부인과 딸을 탈출 시켜려 했으나 결국 부인과 딸들은 북으로 끌려가고
남편의 몸부림치는 동서독 국경지대에서 서로 헤어져야 하는 마지막 부인의 절규가 가슴을 울렸다.
"여보! 남편으로 우리 아이들 아빠로 떳떳이 살아 있어야해요."
그후 30년동안 헤어져 살고 있다.
하루 속히 가족이 만나 살수 있도록 온 국민이 힘을 모아 유엔에 인권을 호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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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책에서 언급된 윤이상에 대한 부분이다.
(북한탈출 전 윤이상으로부터의 편지)
"북한망명을 고민하는 사이 열흘이 훌쩍 지나갔다. 아침에 신문을 뒤적이는데 편지가 왔다. 윤이상에게서 온 것이었다.
나는 놀람 반 불안 반으로 편지를 받았다. 왜냐하면 윤이상이 북과 내통한다는 걸 독일에 사는 우리들은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거물이었다. 편지를 뜯었다.
'간난신고 끝에 학위를 취득한 것을 축하합니다. 이제는 민족통일 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하오. 그러니 북한으로 가서 그동안 배운 지식을 동포를 위해 썼으면 하오.' 그리고 북에 대해서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
(북한탈출 후 윤이상과의 첫 번째 만남에서 오간 대화)
4월 초순 윤이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후이젠호프 호텔에서 보자고 있다.
약속한 날 득달같이 호텔로 달려갔다. 호텔에는 부인 이수자 씨도 같이 있었다.
"동베를린에 있는 공작 거점 책임자를 만나 오박사가 쓴 사과 편지를 읽어보았소. 잘 썼습디다. 그러나 아직은 몰라요. 당신 때문에 동베를린 공작 거점 책임자가 평양으로 소환되었으니까."
"그럼 아내와 딸은 영영 나올 수 없는 겁니까?"
나는 앞이 아득하여 물었다.
"북한에서는 오박사 가족을 서독으로 내보내면 오박사는 칠보산연락소(대남방송 기구) 비밀 소지자이니 가족을 인질로 잡아둘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오. 왜 사람이 그렇게 가벼워요? 조금만 참고 경망된 짓을 하지 않았으면 좋은 직장에 갔을텐데. 당신을 계속 대남 방송 요원으로 쓰려고 하지 않았단 말이오. 닥터 오, 북한에서는 당신의 잘못을 관용으로 용서할 의향이 있다고 했소. 가족을 생각해서 다시 평양으로 가시오."
(북한탈출 후 윤이상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 오간 대화)
"허담이 말하기를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부한 경제학은 우리식 사회주의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했소. 그렇지만 닥터 오한테 좋은 자리를 물색하고 있다고 했소. 왜 그리 성급하고 경솔한 짓을 했소."
"그렇다면 선생님, 그쪽에서 경제학자로서 활동할 여건을 보장해줄 수 없다면 이 제의를 받아들여 주십시오. 저는 어떤 처벌도 감수하고 다시 입북하겠습니다. 그 대신 아내와 애들을 독일로 나와 살도록 해주십시오"
내 말은 다분히 악의가 깃들어 있었다. 윤이상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지금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어? 이 친구가 뭘 알고 하는 소리야 뭐야. 듣기 싫으니 당장 나가시오!"
나는 윤이상이 나를 다시 입북시키려는 술책으로 만나자고 한 것이지 진정으로 내 가족을 독일로 보매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가겠습니다."
나가는 나를 윤이상이 잡았다.
"탁터 오. 잠깐만 참으시오. 내가 듣기로 닥터 오는 수학도 잘하고 수리통계학도 정통하다는데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소?"
"뭘 말입니까?"
나튼 퉁명스럽게 말했다.
"컴퓨터 공학을 한 4~5년 공부해서 가족한테 돌아가는 것이오. 조국은 그동안 가족을 칙사 대접으로 모실 것이오."
그가 어이없다기보다 측은해졌다.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가 있는가. 그 많은 북한행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그는 내가 본 것들을 조금도 볼 수 없었는가.
"동백림 사건의 정하룡씨의 동생 정현룡씨가 칠보산연락소 메아리 방송국에 있습니다. 서울공대 금속공학과를 나왔다고 합디다. 부인 윤향희와 함께 조국으로 가지 못하고 평양으로 도망을 왔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도 대남방송요원입니다.
선생님께서 한민련 구주본부 의장을 맡으셨을 때 국제부장을 지낸 허홍식 씨도 대남방송 요원입디다. 캐나다에서 자연과학 교수를 지냈던 분이 이북을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에게 시키는 일이 공작원들 영어 교육이었습니다. 그 사람 딸은 김영남 외교부장의 영어통역을 한다고 그랬습니다.
부산대 철학과 교수였던 윤노빈도 대남 방송 요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사정이 그 꼴인데 어찌 저에게만 예외가 있겠습니까.
선생님 제 가족만 돌려주십시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저를 입북시키고 제 가족을 내보내주십시오."
나는 북한의 사정에 깜깜한 윤이상을 설득하기 위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으며 가족을 돌려 달라고 애원했다. 윤이상은 북한으로부터 최상의 대우를 받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만 알았지 그는 자신의 북한의 대남 공작 기구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윤이상은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나는 인도적 차원에서 당신을 도우려 했소. 그러나 당신은 내 충정은 손톱만큼도 몰라주고 있소. 당신은 배은망덕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오. 가족을 내보내면 가족과 남한으로 가버릴 위험성이 있어 가족은 못보내주겠소. 허담도 말했듯이 당신은 조선의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고 연락소 비밀을 빼내가지고 달아났소. 당신은 미제 고용 간첩이나 다름 없소. 당신이 미제 고용 간첩이 아니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는 가족이 있는 평양으로 돌아가야 하오. 만약 돌아가지 않으면 가족은 인질로 잡혀 있을 수밖에 없소. 그리고 경솔한 짓을 하면 당신 가족이 어떻게 된다는 걸 명심하시오. 나가시오!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남아야 할 것은 양심이오!"
(북한탈출 후 윤이상과의 세 번째 만남에서 오간 대화)
"평양에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북의 경제사정은 어떻던가요? 좀 나아졌던가요?"
내 질문은 동구가 무너졌는데 북은 언제 무너지나 하는 것이었다.
"조선은 자립 경제를 하기 때문에 동구 현실사회주의와는 달리 끄떡 없습디다."
...
민족의 통일을 중재할 인물은 양쪽에서 똑같이 존경을 받아야 하는 인물이어야 하지 않을까. 윤이상은 북에서는 몰라도 한국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그는 북한의 사상만을 따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었다. 이율 배반이라면 틀린 말일까.
...
윤이상은 서랍을 열어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봉투에서 카세트 테이프를 꺼내더니 녹음기를 꽂고 스위치를 눌렀다. 아아 녹음기에서는 아내의 목소리와 사랑하는 두 애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북의 대남공작기구의 비열하고 무서운 수법에 온몸이 떨려왔다. 나는 윤이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흑백사진 여섯 장을 내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보시오. 당신의 처자식이오."
아내와 애들이 입고 있는 옷과 신발은 모두 5년 전 독일에서 사가간 것들이었다.
"가족을 살려 둔 것이 누구의 덕인 줄 아시오? 내 말을 듣지 않고 다시 경솔한 짓을 하면 당신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소. 왜 사람들을 집적거리고 다니며 북을 욕하는 거요. 가족을 잃어야 정신을 차리겠소? 아까 녹음에서 부인 말을 들었지요? 뭐라고 했소. 통일 운동에 나서라고 하지 않소. 그래야 문제가 풀린다고 했지 않소. 왜 좋은 글을 써서 신문이나 학술잡지에 내지 않소. 그렇게 하지 않고 통일운동을 자꾸 훼방 놓고 다니면 당신 가족은 죽는 줄 아시오.
일전에 평양에서 허홍식을 불러내 만났소. 그는 북으로 진작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했소. 근심 걱정 없이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고도 했소. 부부장급 대우를 받으면서 애도 둘이나 낳았가고 합디다. 나는 허홍식을 윤이상 음악연구소의 부소장으로 앉힐 생각이오. 국제 감각을 가진 사람이 북에는 적소."
그는 북한에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만들어 시계의 음악가를 초청해 잔치를 질펀하게 벌일 생각인 모양이었다.
"선생님 허홍식 선생은 대남 방송요원입니다.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아직도 대남 방송 요원인 줄 압니까. 아닙니다."
윤이상은 병적인 착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누구든지 자신이 앉히고 싶은 자리에 앉힐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2018/11/18(일) 나의 기도 (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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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도 땅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해 본 적이 나의 삶에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성서에는 ‘주기도문’ 이라는 이름으로 요약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그런 말로 그 내용을 그렇게 기도 하셨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주기도문에는 모의고사 시험 문제에 ‘모범 답안지’ 라는 것이 있을 수 있듯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모범적인 기도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젊었을 때 해리 댓만 박사라는 미국 감리교회의 유명한 부흥사와 함께 여러 지방에 부흥회 설교를 통역 해드리러 다닌 적이 있었다. 그는 통역을 하는 나를 옆에 세워 놓고 “나는 늙은 독신자이고, 통역을 맡은 김 교수는 젊은 독신자입니다”라고 하며 번번이 나를 부끄럽게 하였다. 그러다 한 5. 60년의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 늙은 독신자는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고, 이 젊은 독신자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늙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설교도 다니고 간증도 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주기도문을 사랑한다. 과거 2천 년 동안 많은 신도들의 가슴속에 신앙의 길을 열어 준 위대한 기도가 바로 그 주기도문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90을 훌쩍 넘은 이 노종은 아침에 눈을 뜨고 하는 기도가 한마디 밖에 없다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김동길 Kimdonggil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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