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15. 사진 일기(수원예술인 축제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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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테니스대회 호주 오픈 바브리카 우승 장면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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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15. 김용복 이준찬/장대원 박승혜 테니스 경기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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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비가 내려 테니스를 나가지 못했다.
매일 운동으로 흘리더 땀을 흘리지 못해 몸이 무겁다.
오전 내내 집에서 홍재문학상 수상 소감문을 작성해 보냈다.
작가 이력 사진의 해상도가 낮아 사진을 다시보내 달라하여
집에서 다시 찍어 보았으나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늘 12시 30분 효원 예술공원에서 제14회 수원예술인축제가 있어
양승본 소설가와 함께 11시 30분에 만나 공원 근처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오후 2시까지 행사장을 돌아보고 문인들을 만났다.
공연행사는 오후 5시부터 시작이라 나는 먼저 집으로 왔다.
아내가 저녁에는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다고하여 근처 고봉삼계탕을 포장해 먹도록 했다.
오늘 저녁 식사는 삼계탕으로 해결했다.
아내도 나도 때로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식사후 아내를 데리고 아파트 산책운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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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 문학상 수상 소감문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힘이 여기에
김도성
오세영 교수님 시 창작 공부시간이었다. 잠시 여담 시간에 박병두 회장이 홍재 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며 동료 수강생들이 박수를 쳤다. 100점 시험지를 받은 아이처럼 흥분으로 설렜다.
2003년 교직을 정년 후 지금까지 살아온 날을 되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10살 6.25를 만나던 해 넘어져 무릎에 멍이 든 다리가 골절되었다며 돌팔이 침쟁이가 미루나무 부목을 대고 무명 끈으로 한 달간 동여매 놓았다.
전쟁 중, 문을 닫았던 보건소를 찾아가 X-Ray 검진을 해보니 피가 통하지 않아 우측 다리가 곪아 터지기 직전이다. 골절도 되지 않았다. 염증이 심해 뼈가 썩어가는 골수염으로 깊어졌다. 두 차례 뼈를 깎아내는 수술을 했지만 치료가 되지 않았다. 6.25 수복 후 홍성 역 부근 도립병원 수술대에 다리를 절단하기 위해 올려졌다. 팔다리 묶이고 마취를 기다렸다. 다리 절단용 톱이 보였다. 잠시 후 우측 무릎 아래 다리가 잘릴 시간이다. 어머니 아버지 가족들 또래 친구들 얼굴이 그려졌다. 목발 짚은 소년의 모습도 떠올랐다. 하얀 벽으로 페인트 된 수술실 안 흰 가운의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검정 장화를 신고 주변을 맴돌았다. 죽으면 죽었지 목발로 살아간다는 것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간호사에게 부탁해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나 오줌 마려.”
“응! 그래, 사랑하는 아들아.”
옆에 있던 간호사가 복도 끝 화장실을 안내했다. 늦가을 10월 말이었다. 발판에 서서 소변을 보며 창밖을 보았다. 지는 해로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야! 뭐해 어서 도망쳐.’
뒤를 보아도 아무도 없다. 화장실 뒤 쪽문이 보였다. 쪽문을 나와 처음 보는 철길을 따라 해지는 서쪽으로 달렸다. 얼마를 달렸을까. 어두워졌다. 아버지와 나를 가마에 태워 온 동네 일꾼들이 찾아왔다. 집으로 가는 길을 메밀꽃이 밝혔다. 나는 내 운명을 선택하는 지혜를 얻었다. 어린 나이지만 하나님에게 감사했다. 정강이에 상처가 있어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서울대학 병원에서 수술 후 완치가 되었다. 공부를 하지 못한 농부의 아버지 어머니 무식한 돌팔이 침쟁이가 안타까웠다.
대학을 졸업 후 가난한 농촌에서 진학을 못하는 후배들에게 몇 동지의 뜻을 모아 천막학교를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교직을 시작한 동기였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공부하려 배움에 굶주렸던 아이들의 눈망울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그 다리로 36년의 교직생활, 46 동안 지금도 매일 테니스를 하고 있다.
2003년 교직을 정년 후 나의 살아온 경험을 들려주고 싶어 시작한 것이 글을 쓰게 되었다.
2007년 월간 한비문학에 시인으로 등단하면서 1500편의 습작시를 50여 곳의 문학카페에 올리고 있다.
4년 전 뇌경색으로 반신이 불편한 아내를 간병과 집안 살림을 견디게 한 힘을 詩가 도왔다. 시를 쓰는 마음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삶은 사랑이다. 그래 홍재 문학상 수상의 감회가 남다르다. 아직 많이 부족한 詩, 채찍으로 알고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
심사위원 여러분과 수원문인협회 박병두 회장님에게 감사드린다.
자신의 폰에 자진 저장하는 방법/
사진에 손가락을 대면 이미지 저장메뉴를 누르면 자신의 핸폰 갤러리에 저장됨
2018/09/15(토) 운동 시합도 마음대로 못하셔 (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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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시합이 시작되기 직전에 차범근 감독이 매번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었겠는가? 그러나 감독이 기도하고 시작한 시합에서 그 팀이 반드시 이기는 것이 아니고 번번이 지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도 어쩔 도리가 없어서 차범근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만에 하나 저쪽 팀에도 그런 기도를 하는 감독이나 선수가 있다면 하나님의 입장이 얼마나 곤란하시겠는가? 만일 축구 감독이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한다고 가상해 보라. “승부에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평온한 마음으로 임하게 하소서. 우리 편이 이겨도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 편이 져도 낙심하지 않게 도와주소서. 다만 이번 시합에서 부상당하는 선수는 한사람도 없게 하시고 상대방을 증오하는 못된 마음이 이 시합에 응하지 않게 하소서” 그런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 “알았다. 운동 시합에는 나는 개입할 마음이 없다. 너희도 실력대로 해라”라고 하시는 말씀이 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착각일지는 모르지만. 부라질의 어떤 축구광은 실수로 자살골을 차 넣은 선수에게 너무 분통이 터져서 그를 찾아가 총으로 쏴 죽였다고 한다. 하나님이 가장 질색하시는 일이 바로 그런 일일 것이다. 김동길 Kimdonggil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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