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작시 원고

참 빨랐지 그 양반

무봉 김도성 2018. 8. 17. 11:29

 

 

 

 

참 빨랐지 그 양반

이정록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 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 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년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 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 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이정록의 시집 "정말" 중에서

이정록(1964-)

충남홍성태생

시인 고교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