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때는 말없이
현미 / 떠날때는 말없이 (1965) - 거금을 주고 구입한 휴대용 전축
떠날 때는 말없이
무봉 김도성
내가 첫사랑에 미처 살았던 날의 추억을 이제 말 할 수 있다.
1965년 가수 현미의 노래 “떠날 때는 말없이” 한참 유행 했었습니다.
그해 신성일 엄앵란 주연으로 “떠날 때는 말없이”영화가 도시극장에서 개봉 상영 후에는
시골에 천막으로 가설극장을 만들어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노래도 영화도 내게는 나의 청춘을 불사르기에 충분했습니다.
나의 집은 충청도 서산군 **면 면사무소 담장 옆 국도변에 있었습니다.
ㅁ자 초가지붕에 마당 한가운데 푸른 이끼 돋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국도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커다란 부엌에는 크고 작은 가마솥이 4개가 걸려 있고
부엌 뒷문을 열고 나가면 면사무소 담장과 붙은 토담 아래 나의 키보다 큰 장독들이
배를 내밀고 나를 내려 보았습니다.
부엌 오른쪽에는 작은 골방과 안채로 들면 널찍한 마루 따라 안방 윗방
그리고 넓은 대청마루를 꺾어 또 건너 방
그 옆에 큼직한 광에 붙은 뒤지 모퉁이를 돌면 뒷간과 뒷마당으로 나가는 대문이 있었다.
마당 남쪽에는 소외양간과 가을 벼를 보관하는 노적가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머슴 둘을 두고 100 석지기 농사를 감농을 하는 농사꾼이었고
어머니는 커다란 음식점을 운영했습니다.
어머니 음식점 하는 것이 그때는 창피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오늘 밝힙니다.
6.25 동란 후 초근목피로 힘들던 보릿고개에도 배불리 먹고살았던 것은
어머니 덕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가면 동창생 절반이 우리 어머니에게 밥을 얻어먹어
허기를 메웠다고 고마워 했습니다.
저녁이면 늦은 밤 등잔불 아래 아버지 어머니가 돈궤 풀어놓고 돈을 헤고
몽당연필 끝에 침 발라 외상장부 정리하시던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어머니 고쟁이 주머니 속에는 지전과 엽전이 불룩해 여름날 오후 대청마루에서
낮잠 주무실 때 몸을 뒤척일 때마다 엽전이 굴러 마루 밑에 모였습니다.
아이스케이크가 생각나면 마루 밑에서 엽전 찾아 사 먹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한 여름 우물에서 수박 참외 건져 먹던 추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고향 뒷산에는 해발 489미터 연암산이 있고 산 아래 들판을 2킬로 지나면
멀리 안면도가 가로막힌 천수만 바다가 있습니다.
만조가 되면 간월암이 수평 선위에 동동 떠있고 간월도의 해넘이는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어머니는 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배 떼기로 흥정을 했습니다.
도미 민어 조기 갈치 장대 박대 장어 대하 바지락 대합 꽃게 주꾸미 낙지 갑오징어 등등
대하를 여러 개의 가마솥에 삶아 20마리씩 새끼줄에 엮어 뒷마당 빨래 줄에 널면
마치 붉은 비단처럼 펄럭였습니다.
마른 대하 오징어 명태 등 건어물을 창고에 두고 어머니가 자물쇠로 잠갔습니다.
초등학교 여름방학에는 삼베 팬티 하나 걸치고 낚싯대 메고 갯벌 따라 4킬로 걸어가
밀물 따라 뒷걸음으로 망둥이 잡던 재미가 잊혀 지지 않습니다.
후일 초등학교 친구 병득 이는 망둥이 잡는 재미에 낚시하다 밀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잠시 고향에서 지내며 농촌 계몽에 뜻있는 동지들과 지역 유지들의 도움으로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후배들에게 중학 졸업자격 위한 고등공민학교를 운영했습니다.
200여 명이 넘는 학생 중에는 장가를 간 애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모두들 가난하고 배가 고파 목에 풀칠하기도 힘이 들었으니 공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의 한 말씀이라도 놓칠세라 경청하며 바라보던 반짝이는
초롱초롱한 눈동자의 얼굴들이 생각납니다.
천막학교에서 어렵게 새로 교실 3칸을 지어 학생들이 안정된 공부를 했습니다.
언젠가 아카시 꽃향기 짙게 퍼지는 5월 어느 수요일 우체국 아저씨가 수신인만 적혔고
발신인이 없는 편지 한 통 건네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누가 볼세라 교실 밖 모퉁이에 앉아 읽어 보았습니다.
편지 첫머리 글에 “사랑하는 용복 씨에게” 솜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약간 현기증이 일고 가슴이 흥분되었습니다.
지금껏 태어나 사랑하는 용복 씨란 말 생전 처음입니다.
내용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천천히 그리고 몇 번을 반복하면서 읽었습니다.
그대를 항상 옆에서 또는 멀리서 바라보면서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는 여인입니다.
오래 동안 나 혼자 사모하며 짝사랑으로 그대 방문 창가를 불 꺼지는 늦은 밤까지
바라보면서 앞에 서지 못하는 심정 그대는 모를 겁니다.
나의 온몸은 편지를 읽는 순간 감전된 사람처럼 정신이 몽롱했습니다.
몸을 꼬집어보았지만 꿈은 아니었습니다. 분명한 현실이었습니다.
읽다 말고 편지의 말미를 보니 발신인 이름은 없고 당신을 사랑하는 여인이라 쓰였다.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잘나지도 못난 이 사람을 사모하는 그 여인은 누구일까?
평소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 주변에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조그마한 고향 마을로 짐작되는 여인은 없었습니다.
여자의 필체로는 달필이요 문장력도 뛰어났습니다.
분명한 것은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나의 주변에서
나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는 사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사춘기를 지나 동경의 이성이 그리운 나이였습니다.
오 그대여 이 여인의 간절한 소원이니 부탁을 들어주세요.
금주 토요일 저녁 8시경에 초등학교 솔밭 벤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소원을 이루지 못하면 차라리 저승에 가서 그대를 사모하리다.
가슴 엔 전율이 진동했고 등골에 한 줄기 땀방울이 소리 없이 선을 그으며 흘렀습니다.
수요일 오후에 받은 편지로 머릿속에 궁금한 수수께끼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 나도 모르게 토요일이 기다려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나는 순수하고 순진하며 용기 없는 숫총각이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때 그 감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못했으나 친구로 알고 지내는 마을 여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그 여자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간간이 수업 중에도 궁금한 그녀의 모습이 궁금했습니다.
드디어 주말 토요일이 되었다.
그날따라 저녁까지의 시간이 왜 그리 긴지 시계만 자주 보았습니다.
시간이 정확한 것도 아니고 저녁 8시경이라 했으니 아마도 8시는 지나 보아야 했습니다.
한낮의 무더위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식어 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묘령의 그녀를 만나기 위하여 집에서 목욕을 하고 이발을 했습니다.
머리에는 포마드를 바르고 웃돈을 주며 멋진 고데를 이발사에게 부탁했습니다.
이발사가 선을 보러 가느냐고 놀렸습니다.
아니요 하며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하얀 와이셔츠에 빨간 넥타이를 착용했다.
넥타이 착용하는 줄을 몰라 선배 형에게 부탁했다.
넥타이를 벗을 때는 풀지 않고
그대로 약간 풀어 머리 위로 벗어 벽에 걸어 두었다가 사용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로 단벌의 양복바지를 숯 다리미로 바지 주름을 세웠습니다.
검정 구두를 오후 내내 광이 나도록 닦았습니다.
해는 서서히 서산으로 기울고 땅거미가 서서히 찾아왔습니다.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초등학교 쪽을 살펴보았습니다.
운동장에서 어린아이들이 공차는 소리가 요란했고 해가져 어두워지자 아이들이 하나둘 집으로 갔습니다.
저녁놀이 붉게 물들고 빨갛게 지는 해 앞으로 물새들이 짝을 지어 날아갔습니다.
저녁 8시가 되었다. 초등학교 솔밭에 시선을 고정하고 바라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에서만 바라보던 초등학교 솔밭으로 용기를 내어 걸어갔습니다.
학교 울타리는 향나무 울타리로 무성하게 자랐고 교문을 들어서면
두 그루의 플라다나스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위용을 자랑했습니다.
나의 걸음이 주춤했고 순간 돌아갈까 망 서려 졌습니다.
곁눈질로 솔밭 쪽을 바라보았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순간 어느 누군가의 장난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창피한 생각이 앞섰다. 향나무 울타리에 숨어 기다렸습니다.
시계를 보니 8시 30분 나 자신이 초라함을 느꼈습니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 고개를 숙여 발끝으로 땅에 낙서를 했습니다.
도대체 누구의 장난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 9시가 되어 집으로 왔습니다.
누구의 장난인 줄 알면서도 편지에 사모하는 그대라는 글귀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얼마 후 여자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초등학교 3년 선배 누나가
나와 여자 친구와 사귀도록 두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순진한 나만 감쪽같이 속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 여자 친구가 나의 첫사랑 1년 연상의 미용사이었습니다.
미용실이 저녁 10시 지나 11시에 문을 닫기에 한 번 만나려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난 우리 집 추녀 밑에서 미장원 불이 꺼질 때를 기다렸습니다.
같은 마을에서 다른 사람 모르게 데이트해야 하므로 전화도 전기도 없던 때라 사전에 연락
할 길이 없었습니다.
우린 아무도 오가지 않는 늦은 밤에 만나 물레방앗간 상엿집 서낭당 공동묘지 풋보리 밭
해당화 피는 천수만 백사장과 갈대숲을 헤맸습니다.
보통 새벽 3-4시에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유행했던 가수 현미의 노래 “떠날 때는 말없이”를
우린 천수만 파도소리 들으며 애창하였습니다.
용돈을 있는 대로 모으고 여기저기에서 돈을 꾸어
내셔널 휴대용 전축을 거금을 주고 하나 구입했습니다.
해당화 붉게 피는 천수만 백사장에서 전축 음악 반주에 맞춰 서툰 춤도 추었습니다.
지금 그 백사장은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이 간척사업으로 없어졌습니다.
그때 부른 “떠날 때는 말없이” 노래 말처럼 나의 첫사랑은 말없이 떠났습니다.
2017. 7. 10.
현미 (떠날때는 말없이) 1965 오아시스 OL 12450
작편곡(이봉조)/연주(이봉조와 그의 악단)
1. 그날 밤 그 자리에 둘이서 만났을 때
똑같은 그 순간에 똑같은 마음이
달빛에 젖은 채 밤새도록 불렀죠
아아아 그 밤이 꿈이었나 비 오는데
두고두고 못 다한 말 가슴에 삭이면서
떠날 때는 말 없이 말없이 가오리다
2. 아무리 불러도 그 자리는 비어있네
아아아 그날이 언제였나 비 오는데
사모치는 그리움을 나 어이 달래라고
떠날 때는 말없이 말없이 가셨는가
유 호:작사/이봉조: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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