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작시 원고

씨 뿌린 날

무봉 김도성 2018. 3. 13. 16:07

 

 

 

 

 

    씨 뿌린 날

     

    김도성

     

    밤에 보는 민들레 영토에는 민들레꽃이 달빛에 화장하듯 바람에 흔들렸다

    언제나 씨를 가진 것은 씨 밭을 찾아 씨방을 점령하려 때론 목숨을 걸었다

     

    코밑에 솜털이 뽀송한 사춘기 이상한 소리에도 귀가 솔깃해 호기심이 커갔다

    들녘에서 한여름을 지낸 알곡들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뒤지 안에서 들려왔다

    자세히 들어보니 농사일에 힘들었던 아버지의 한숨과 해수 소리 같기도 했다

     

    사연도 모르는 생솔가지 타는 연기가 유령처럼 하늘에 솟구치던 늦가을 밤이다

    단칸방에서 아랫목에 아버지 어머니가 잠들고 4형제가 굴비 엮이듯 잠이 깊었다

     

    그날 밤도 아버지는 어머니 배에 호미 같은 기구로 밤새 씨를 뿌렸다고 생각했다

    짐작은 틀림없이 적중해 얼마 후 다섯째 막내를 어머니 뱃속에서 안고 오셨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아가가 생기는 신비를 짐작으로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나만 보면 다리 밑에서 주워 온 놈치고 실하게 잘 큰다는 말뜻도 알았다

     

    언젠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슨 연유인지 다시는 살지 않을 것처럼 싸웠다

    속이 상한 어머니는 빨래터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아버지 속옷을 죽어라 두들겨 팼다

    보다 못한 오일장에 가시는 아버지의 등에서 연기 같은 것이 올라갔다

     

    어머니는 다투고 난 후 장날 선물을 사다 주었던 아버지를 기다렸다

    하얀 광목 치마저고리 다려 입고 동백기름 머리에 발라 가르마 타 곱게 빗었다

    노을 진 언덕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길어진 목덜미에 미루나무 그림자 내려앉는다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여 내리고 올리고 치마 끝에 바람이 일도록 사립 문밖 들락거렸다

    어둠이 먹물처럼 번질 때 헛기침 소리와 함께 지게가 쿵 땅을 디뎠다

    젖은 손 행주치마에 닦으며 말없이 밥상 챙겨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밥상 위에 은비녀와 동동 구리 모가 올려 나왔다

     

    저녁 바람에 보리밭이 출렁이고 미루나무 가지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아버지 방에 등잔불이 꺼지고 이브자리 들썩이는 바람에 문풍지도 울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여보! 웟디어.”

    어머니는 한참 있다가

    언제! 헌겨.”

    며칠 전에 뽑아 놓은 무청처럼 아버지는 오늘도 불발탄을 쏘았나 보다

    안마당 우물가에서 뒷물 소리와 함께 아버지 속옷을 조물조물 빨았다

     

    씨 뿌린 다음날 아침 아버지 밥상에 굴비가 떡 올라왔다


    2018. 3, 15. 생일에


 

음악 : Morning Mood - Band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