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出於藍(청출어람)/ 정현 선수를 응원한다.
靑出於藍(청출어람)
김도성
정현 테니스 선수가 호주오픈 대회에서 8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바라보며 나의 삶을 돌아본다.
대학을 졸업 후 나는 고향에서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못하는 후배들에게 공부하도록 천막학교에서 봉사로 근무한 것이 교사의 길을 가게 되었다. 고향의 몇 동지들이 사재를 털어 천막교실을 짓고 초등학교 졸업 후 진학을 못하는 아이들 200여 명이 주경야독을 했다.
작은 면소재지에서 이웃 마을 처녀 미용사를 알게 되어 3년간 첫사랑에 빠지기도 냈다. 소문이 두려워 우린 다른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야 했다. 저녁 11시부터 새벽 4시까지 들개처럼 쏘아 다녔다. 상엿집 서낭당 물레방앗간 공동묘지 천수만 해변 보리밭 삼밭 대숲이 첫사랑 아지트였다.
보리밭 이랑의 풋보리를 양쪽으로 제치고 하늘을 보고 누우면 둘만의 오붓한 신방이었다. 우리는 사랑을 포개고 종달새는 옆 둥지에서 알을 품었다. 한여름 밤 산이나 들판을 쏘아 다니다가 소나기를 만나면 상엿집이나 물레방앗간을 숨어들었다. 방앗간 볏짚을 태우며 옷을 말리던 첫사랑 어깨에 걸친 붉은 브래지어 끈을 훔쳐보던 설렘은 지금도 가슴이 출렁인다. 늦가을 서리 내리는 추위가 찾아오면 묘지 상석에 누워 데이트를 했다. 한낮에 데워진 묘 상석이 온돌처럼 따뜻했다. 우린 나란히 상석에 누워 하늘의 별자리를 가리키며 수많은 사랑을 속삭였다. 해당화 피는 여름밤이나 동백이 붉어지는 겨울이면 천수만 백사장 데이트를 잊을 수가 없다. 가수 현미의 떠날 때는 말없이 노래가 유행하던 60년 대였다. 모아둔 목돈을 탈탈 털어 미제 휴대용 전축을 샀다. 밤마다 천수만 백사장에서 엘피판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자주 듣던 떠날 때는 말없이 노래 말처럼 우린 결별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집 앞 신작로 건너편에 미장원을 운영했던 첫사랑은 미용사였다. 당시에는 손목시계가 없어 약속 없는 날은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미장원 문을 닫을 때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리 집 추녀 밑에서 기다려야 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시간에 미장원 불이 꺼지면 만나지 못해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보고 싶어 잠이 오지 않으면 자정을 넘어도 길 건너 집을 찾아가 담장 밖에서 문에 돌을 던지거나 뻐꾸기 울음 신호로 불러내기도 했다.
헤어지기 전날 저녁 붉은 천 춤추는 서낭당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사정으로 약속이 변경되면 붉은 천에 매듭 하나 묶어 놓으면 못 온다는 표시오. 두 번 매듭을 지으면 꼭 온다는 표시였다. 매듭 표시가 없으면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 판단 대충 한 시간 기다렸다. 그런데 두 매듭 중 한 매듭이 잘못되어 풀리면 허탕을 친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속담처럼 2년간의 열애 끝에 들통이 났다. 우리의 아지트를 산속에 토굴을 파놓고 낙엽을 두툼하게 깔았다. 낮에는 입구를 솔가지로 가려 덮어 위장했다. 저녁마다 그곳에서 데이트를 했다. 당시에 해변을 통해 간첩들이 침투하던 시절이라 산속 아지트를 누군가가 신고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데이트하다가 횃불 들고 올라온 마을 청년들에게 들통이 났다. 이제 하는 수 없이 부모님에게 결혼을 허락해 달라 했으나 어머니가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적극 반대했다. 같은 마을이라 양가 부모들은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더 이상 고향에 있을 수가 없어 모든 것을 잊기로 하고 예산 시골의 작은 기독교 학교로 옮겼다.
그 이듬해 다시 대전에 있는 학교로 전근을 했다. 그 후 첫사랑이 내가 있는 학교를 수소문하여 편지를 보냈다. 고향의 미장원을 정리하고 대전 가까운 공주 유구에 미장원을 차렸다고 했다. 1년간은 매주말 대전 유구를 오며 가며 대책 없는 사랑에 빠져 지냈다. 그해 며느리가 보고 싶다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자궁암으로 수술 후 서울 안암동 형님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미용사 애인과 함께 어머니를 찾아가 결혼을 승낙 받으려 했으나 극구반대 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린 결별을 했다. 나는 잡념을 잊기 위해 또 예산의 시골학교로 옮겼다. 어머니가 왜 반대를 했는지 속뜻을 지금도 알 수가 없었다.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의 입장에서 추리해 보면 어머니와 첫사랑 아버지의 관계가 의심스러웠다.
모든 것을 잊기 교회 생활에 충실하며 믿음 생활로 근신했다. 하기 신학대학 학점도 16점을 이수했다. 그러던 중 목사님의 중매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나는 충청도 서산 사람 아내는 강원도 횡성으로 서울에서 만나도 하룻길이었다. 10월 3일 서울 신설동 로터리 태극당 제과점에서 맞선보고 10월 9일 창경원 데이트 한 번하고 10월 23일 청량리에서 약혼식 올리고 11월 13일 서울 을지로 예식장에서 목사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 만나 43일 만에 결혼을 했다. 첫사랑이 축하한다는 축전을 보내왔다. 당시에는 아내의 첫인상만 보고 결정했다.
시골학교에서 1년간 토담 초가 단칸방에서 신혼 생활을 했다. 큰형이 서울에서 아파트 건축사업 부도로 고향의 그 많은 전답을 모두 팔아 없앴다. 강원도 횡성이 고향인 아내의 신혼살림도 단칸방이라 이브자리와 옷 철가방 하나 들고 시집와 신혼을 했다. 흙 부뚜막에 찬장 하나 연탄아궁이, 부엌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쪽문 앞에 아내 신 내신 나란히 놓고 어렵게 살았다. 채식을 주로 먹으며 어렵게 생활하다 보니 나는 한때 영양실조로 다리 부종과 황달로 고생을 했다.
그 이듬해 다시 대전 학교로 옮겼다. 형편이 어려웠으나 셋방살이하면서 아내가 적금을 들어 학교 주변 땅을 샀다. 앞으로 두 딸의 교육도 하려면 지금의 봉급으로는 어렵다는 생각에 서울 사립 공채 시험으로 1971년 서울로 옮겼다. 대전에 사두었던 땅을 팔아 신대방동에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샀다. 지금의 금천구 시흥동에 있는 신설 사립학교에 근무했다. 첫해 근무하는 것을 보아 봉급을 책정해 준다며 기본급만 받고 1년을 근무했다. 1년이 지났는데도 봉급 사정을 해주지 않았다. 저녁에는 학생들 과외 수업으로 받는 수입이 봉급보다 나아 생활에는 지장이 없었다. 2년이 지나도 학교 봉급은 사정해 주지 않고 부교재 교복 수입을 서무과를 통해 재단 수입으로 처리했다.
당시 나는 연구주임을 담당했는데 교감이 주동이 되어 각 부장들도 학교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지금은 그 학교 규모가 커져 축구로 유명한 문일 중고와 안양에 안양대학과 안양과학대학 재단이 있다.
1972년 서울 구로공단 입구 앞 남부경찰서 안에 테니스 코트가 생겼다. 매 주말이면 하루 종일 테니스를 쳤다. 일요일 새벽에 나가면 하루 종일 자장면 한 그릇으로 하루 식사를 해결했다. 당시에는 레슨 받을 곳도 없어 나름대로 포핸드 백핸드 스매싱 서브 연습을 했다. 방안에서 라켓 들고 연습하다가 형광등도 깨고 유리창을 박살 내 아내와 다툼도 많이 했다. 아마 그때가 우리나라 테니스가 처음 보급될 때다.
그런데 학교에 대한 불만이 쌓였던 교감과 주임들이 모 주임 집들이하는 날 저녁에 학교의 부정부패를 폭로하는 모의를 했다.
결국 디데이를 잡아 75년 6월에 수업거부와 언론사 방송사를 불러 놓고 학교 부정부패를 폭로는 선언문을 배포했다. 당시 유신 계엄령 시대로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다. 을은 언제나 갑 앞에서 힘이 약했다. 나는 구걸하고 싶지도 않고 자존심 때문에 학교를 떠났다. 12명이 모의했는데 2명이 배반해 10명은 학교를 그만두었다. 다른 사립학교로 학교를 옮기려 했으나 소문이 나서 자리를 옮길 수가 없었다. 공개 수업으로 채용이 확정되었다가도 문제교사가 알려지면 채용이 취소되었다. 먹고는 살아야 하므로 동대문 창신동 창신 여상 야간에 강사 생활 하면서 낮에는 학원에서 공립학교 순위 고사 공부를 했다.
75년 겨울 서울 순위 고사는 자신이 없어 경기도 교사채용 순위 고사에 응시했다. 수학교사 40명 모집에 순위 4위로 합격 했다. 당시에 서울 독산동 코카콜라 공장 주변 신성 아파트에 살았다. 첫째 둘째 딸은 문성초등학교에 재학 중이고 늦게 둔 셋째 딸은 유치원에 다녔다. 순위 고사를 합격해도 시골학교에 발령이 된다고 했다. 당시 아이들은 서울에서 공부시키고 싶었다. 시골학교에 발령 나면 한두 해 근무하다가 생활근거지 부근으로 발령받아오면 되는 것을 아내와 떨어져 산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수원에 있는 학교에 근무만 해도 서울에서 버스로 출퇴근이 가능했다. 그래서 나 혼자 판단으로 수원시내 학교에 근무하다가 서울로 다시 옮기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기도 교육청 수학담당 장학사와 상담을 했다. 장학사는 신분이 보장되고 안정된 공립학교 근무를 권했다. 정히 사립학교라도 가려면 소개해 준다며 영복여고를 소개했다. 리화순 영복여고 교장 면접한 결과 호봉이 높아 채용이 안 되었다. 교장은 나에게 어렵게 합격한 공립으로 가라고 권면했다.
하지만 일단 면접을 받아 보고 결정하려고 장학사가 소개하는 삼일 학원에 갔다. 당시 삼일 학원에는 대지 2만 평에 삼일중학교 삼일상고 삼일공고 삼일야간 여상이 있었다. 삼일상고 교감이 내 이력서를 보고 홍고 후배라며 반갑게 맞아 교장실로 안내했다. 삼일중학교 교감과 삼일상고 공고 야간 교감으로 교장은 장기홍 교장 한분으로 목사님이었다. 학교 건물 역사나 규모, 학생 수 그리고 운동장에서 머리가 흰 체육 선생을 보니 근무만 충실하면 신분은 보장 될 것 같았다.
장기홍 교장 면접을 했다. 역시 봉급이 많아 채용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채용이 안 되면 공립학교에 가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교장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교장실을 나가려는데 교장이 나를 부르며 혹시 취미가 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테니스에 미쳐 살고 있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 그래요. 그러면 가시지 말고 교무실에서 기다리라 하며 교감을 불러달라고 했다. 교감이 교장실을 나와 교장이 당신을 잡으라고 합니다. 지금 교장이 테니스에 미쳐 있습니다. 그리고 봉급은 1호봉 낮춰 지급하다가 1년 후 재사 정 해준다는 것이다. 나는 집에 가서 생각해 보고 2,3일 내로 연락하겠다며 나왔다. 운동장에는 오후에 테니스를 할 수 있도록 테니스 그물망이 놓여 있었고 중. 고등학교에 테니스선수를 육성하는 테니스부가 있었다.
결국 나는 공립학교 발령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쓰고 1976년 3월 삼일중학교 수학교사로 부임했다. 아쉬웠던 것은 나 다음 순위 5위가 수원 수성중학교에 발령이 났다.
1년간은 서울에서 출퇴근했다. 1년 후 중학교 2학년 담임을 하면서 정현 군 아버지 정석진 군을 담임했다. 정석진 군은 연무초교를 나와 테니스 특기자로 삼일 중학교에 다녔다. 함께 근무하던 동료 교사들이 무엇 때문에 시간과 교통비 낭비하며 서울에서 다니느냐 수원으로 이사 오라 권했다. 결국 서울 사립학교로 옮기는 희망을 포기하고 수원 삼일상고 근처 매향동 연무초교 앞으로 이사를 했다. 바로 우리 집 앞에 장기홍 교장 사택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나는 이사 오자마자 새벽 6시 장기홍 교장 테니스 파트너가 되었다. 중학교에 2년 근무 후 삼일상고 교사로 옮겼다. 아침마다 테니스를 하며 교장선생님에게 말씀드려 1년 후 봉급 호봉을 제대로 책정받았다. 상고 수업계 2년을 보다가 바로 교무주임에 발탁되어 기존 근무자들로부터 미움도 받았다. 교무주임만 10년 보면서 신입생 모집 활동 섭외로 당시 공립 중학교 중3 담임과 교감을 많이 알게 되었다.
정현의 아버지 정석진 군이 삼일상고 테니스 선수 졸업 후 건국대학 교체육과에 입학했다. 당시 정석진 군은 키가 175센티로 작아 자네는 선수 생활로 먹고사는 것이 힘들 테니 체육교사가 되라고 진로 상담을 해주었다. 다른 선수들은 상고 졸업생으로 상과 계열 학과에 진학을 했다. 결국 정석진 군은 체육대학 졸업 후 모교인 삼일공고 체육교사로 채용되었다. 간호사 부인을 얻어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이 정홍 둘째 아들이 정현이다. 당시 아내와 별거하면서 두 아들을 죽산 초등학교와 죽산중학교 테니스 특기자로 키웠다. 중학교 졸업 후 아버지 학교인 삼일공고에 두 아들이 입학했다. 큰아들 정홍 군도 국가 대표 테니스 선수이고 정현 군은 삼성기업 소속 선수다.
정석진 선생은 삼일공고에 체육교사로 20년 근무하다가 3년 전 퇴임 후 아들 정현 군 소속 삼성에 발탁되어 아들 메니 져 근무하고 있다.
나는 1972년에 테니스를 취미로 시작해 1976년 삼일학원에 근무하면서 현재까지 눈비 오는 날을 제하고는 매일 아침 테니스를 하고 있다.
바로 정석진 군과 그 아들 정현이 운동했던 테니스 코트에서 46년 넘도록 운동을 한다.
며칠 동안 제자의 아들 정현 군의 호주오픈 테니스 대회 중계를 보면서 연 4일 동안 친지들과 기분 좋은 술을 마셨다. 남다르게 응원했다. 감회가 새롭다. 어깨가 올라갔다. 벌써 이영택 선수의 기록을 깼다. 국내적으로 너무나 길어진 적폐 청산으로 답답해지는 요즘 우승의 쾌거로 분위기가 쇄신되었으면 좋겠다.
이를 靑出於藍(청출어람)이라 했던가.
2018. 1. 23.
정현 선수가 수원 삼일공고 체육특자 테니스 선수로
체육교사 아버지 정석진 선생(테니스감독)에게 3년간 운동했던 테니스 코트입니다.
내가 매일 아침 6시부터 9시까지 운동하는 삼일공고 테니스 코트
수원화성으로 둘러진 아늑한 환경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지정 수원 화성의 동북포루
테니스 코트 옆 삼일 동산 벚꽃이 한창이다.
삼일동산
수원화성과 벚꽃
삼일공고 정문앞 삼일동산
수원화성 산책로
테니스 코트 전경
세계문화유산 지정 수원화성
화성 밖 마을
멀리 연무대와 서북 공심돈이 보인다.
수원 화성 산책로
삼일상고와 테니스 코트 전경
까치집 있는 메타세콰이어 나무 내가 삼일학원에 부임하던해 1976년 직접 식목한 나무다.
나는 이곳 테니스 코트에서 거의 매일 1976년부터 아침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멀리 장안문과 화홍문이 보인다.
방화수류정
연무대 활터
연무초등학교
화룡전 연못
영산홍도 곧 피겠다.
꽃밭속의 테니스 코트
수원 팔달산
산책로와 쉼터
잔디와 벚꽃
숲속의 아늑한 테니스 코트
새순돋는 나무들
봄햇살을 만끽하고 있다.
테니스 코트 이용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