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사진 일기

2017. 7. 23. 사진 일기(종심소욕불유구, 중국 3대 명주의 하나 수정방)

무봉 김도성 2017. 7. 23. 05:15

   

 http://blog.daum.net/ybok1004/        홈피 바로 가기 


국제 테니스대회 호주 오픈 바브리카 우승 장면 동영상

http://tvpot.daum.net/v/v57e9xRbwbUYsww44RbUpRY

 2016. 7. 15. 김용복 이준찬/장대원 박승혜 테니스 경기 동영상

http://tvpot.daum.net/v/v5b08ff7BiwuOBEnjfnmijm




베란다 다육이 선인장 옆에 놓고 수정방 술을 사진에 담았다.

선인장도 명주에 입벌려 입맛 다신다.



중국 3대 명주 마오타이, 수정방, 오량액으로 수정방은 500밀리리터, 52%  1병의 면세점 가격이 106달러 한화로 환산하면  121,310원이다.

오늘 (2017. 7. 23.) 이른 아침 부터 비가 내려 아침 테니스를 나가지 못했다.

어제 밤 그동안 한양대학 경영학과 기숙사에서 지내던 손자가 방학이 되어 짐을 챙겨 왔다.

1주일 후 월요일에 충북 괴산에 있는 ROTC 군사학교에 훈련차 입소 한다.

큰 딸과 사위 부부가 같은 회사원으로 중국 상해 지사에 나가 있어 주말이나 방학이면 나와 함께 지낸다.

앞으로 1주일 후 군에 입소해 훈련을 받게 되는데 비린 생선류는 전혀 입에 대지 못하는 나쁜 식습관 때문에

어떻게 군생활에 적응할 것인지 걱정이다.

1주일간 나와 함께 지내는 동안 할머니는 몸이 불편하여 내가 직접 식사를 챙겨 주어야 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일상이 저녁 늦게까지 친구를 만나 시간을 보내다가 새벽 2시경에 들어와 아침 11시경에 기상한다.

그래서 아침은 함께 먹지를 못하고 점심을 함께 하게 된다.

점심은 손자가 삼겹살과 비빔냉면을 먹겠다고 해서 끓여 주었다.

아내와 나는 비빔 국수를 끓여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저녁식사 반찬이 문제였다.

오후 3시경 수원 화성별관 갈비집에 갈비탕 2인분 포장 주문하고 매향 통닭 한마리를 포장 주문했다.

오후3시 30분경 나는 아내와 손자가 마주 앉아 통닭을 먹었다.

마침 하루 종일 비가 내려 운동도 못해 몸이 둔하고 머리가 무거웠다.

통닭을 앞에 놓고 술생각이 났다.

겨울방학에 중국에 있다가 지난 봄 개학 관계로 한국에 들어온 손자가 할아버지 선물로 중국의3대 명주의 하나인 수정방 500밀리리터 52% 한병을 선물했다.

오늘 나혼자 수정방 독주를 몇 잔마셨다.

술의 향과 맛이 입에 당겨 몇 잔 족히 마셨다.

수정방에 담긴 술 이야기를 아래에 소개합니다.






술에 담긴 이야기

중국 백주 전설에 의하면, 14세기 백주 증류의 장인 왕씨가 품질이 뛰어난 백주의 제조비법을 완성했다. 마침내 궁극의 백주 제조법을 발견했다고 확신한 그는 성도(成都)의 수정가(水井街)에 자신의 양조장을 세웠다. 그리고 600년 전설의 이 양조장이 바로 1998년에 사천성(四川省) 성도에서 원형 그대로 발견되었다. 양조장이 발견된 이후 고고학자들의 발굴작업 끝에 전설의 수정방 증류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정방 증류소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증류소로, 원형이 잘 보존된 독특함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었다. 발굴단은 전설의 증류소뿐 아니라 초기의 수정방 증류방식을 보여주는 단서를 찾아냈고 당시의 배양균(효모)을 살아 있는 채로 발견하였다. 고대 건조실, 발효지, 증류기의 원형 등이 그대로 보존된 모습에 모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얼마 후 역사유적위원회는 수정방 증류소를 현존하는 유일한 고대 증류소이자 '중국 최초의 백주 증류소'로 선언했다. 중국 백주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수정방 증류소는 곧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 주요 문화재'로도 지정되었다.

수정방 월베이(52%, 500ml)


이곳에서 발견된 수원을 다시 살려 지하수를 끌어올리고, 소량의 지하수 로 현대식 제조방식을 접목시켜 술을 만들었으니, 바로 오늘날의 수정방이다. 수정방 생산지 성도는 기후가 온화하고 습도가 적절하며 일 년 내내 봄 같은 날씨다. 또한 영양분이 풍부한 비옥한 토지와 근처의 산에서 눈이 녹아 흘러온 맑은 물을 자랑한다. 여러 이유로 성도는 백주 제조에 가장 이상적인 곳으로 여겨진다.

수정방의 재료는 전통적인 쌀, 찹쌀, 밀, 옥수수, 수수이며 성도 지역의 순수한 물을 사용한다. 수정방은 대곡주로 전통적인 고태법(固態法) 발효를 하며, 흙으로 된 발효지에 곡물을 넣고 덮은 뒤 60~70일가량 묻어둔다. 보통 날씨가 더우면 기간을 조금 줄이고 추우면 75일까지 걸리기도 한다. 수정방은 모든 과정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수정방은 두 번의 증류를 거치며 40개의 단식 증류기를 보유하고 있다. 증류를 마치면 등급에 따라 4개로 구분하여 2~3여 년간 숙성시킨다. 숙성된 원액을 테이스팅하고 혼합하여 다시 2년간 숙성한다. 숙성에는 최소 5년이 걸리는데, 진흙으로 만든 항아리에서 숙성이 진행되며 상온에 그대로 놓아둔다.

수정방의 병 바닥에는 여섯 폭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모두 사천 성도의 주요 명승지다. 이를 '육각(六角)'이라 하며 아래에 그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수정방 스콜라스 에디션(54%, 1000ml)


수정방 클래식(48%, 500ml)


수정방 포레스트 그린(52%, 500ml)


수정방 육각(六角)의 의미

두보초당(杜甫草堂)
두보초당(杜甫草堂)

당나라 시성(詩聖) 두보가 안사의 난을 피해 759년부터 4년간 기거했던 곳이다. 평생을 실의에 빠진 채 방랑하며 지냈던 두보는 이곳에서 평화로운 생활을 하며 240여 편의 주옥 같은 시를 지었다고 전해지며, 현재 초당은 중국문학사의 성지로 되어 있다.

합강정(合江亭)
합강정(合江亭)

사천성 성도에 부하(府河)와 남하(南河)가 부남하(府南河)로 합쳐지는 곳에 있는 전망대로, 1200년경에 건축되었으며 이별을 고하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무후사(武侯祠)
무후사(武侯祠)

유비와 제갈량의 제사를 모신 사당으로 한소열묘(漢昭烈庙)라고도 한다. 1,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중국에서 유일한 군신(君臣) 합재 사묘이며 가장 유명한 삼국역사박물관이다.

구안교(九眼橋)
구안교(九眼橋)

1593년 명나라 때 만들어진 유명한 다리로, 1790년 청나라 건융(乾隆) 시절에 수리를 할 때 다리 밑에 9개의 구멍이 있어서 구안교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팔선(八仙) 중에 철괴리(鐵拐李)가 구안교에서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망강루(望江樓)
망강루(望江樓)

중국 당나라 여류시인 설도(薛濤)를 기리는 유적지다. 설도는 특히 대나무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이곳에는 150여 종의 대나무가 있다. 설도는 친구나 가족을 송별하며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고 한다.

수정소방(水井燒坊)
수정소방(水井燒坊)

원나라 후기에서 명나라 초기부터 시작되어 명, 청을 지나 현재까지 이어온 백주 조방(糟坊)이다. '중국 농향성 백주의 무자역사(無字歷史)'로, 또한 '중국 백주 제일방(第一坊)'의 입지로 되어 있다.























수정방 가격:: 면세점에서 수정방 구입했어요! 







2017/07/23(일) -내가 가장 행복했던 때- (3371)

 

노인에게는 길고도 긴 미래를 설계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은 날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는 내일을 꿈꾸지만 늙은이는 어제를 되새기는 일이 고작입니다.

내가 매우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는가? 물론 크게 감동한 날은 1945년 8월 15일, 나의 조국이 35년의 긴 세월 일제의 종노릇 하다가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바로 그 날이었는데, 나이는 열여덟이었고, 앞으로 ‘조선’은 어디로 갈 것인가 불안한 느낌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기억하는 나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1941년 이른 봄, 내가 중학교 시험에 합격했다고 발표가 있었던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그 중학교는 평양 만수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시절에는 합격자의 명단이 판대기에 수험번호로만 게시되었습니다. 학교 직원이 날이 채 밝기 전에 들고 나와 교정에 세워놓았습니다.

아버님은 아직 40대셨고 어머님은 아직 30대셨습니다. 이화여전에 다니던 누님도, 서울서 소화공과(昭和工科)를 마치고 도목 기술자가 된 나의 형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나의 수험번호는 886, 아마도 200명 모집에 1,000명은 지원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한지에 적힌 내 번호를 식구들이 다 찾아보고 기쁨의 환호성이 새벽 공기를 흔들고 터졌습니다. 우리가 다 함께 만수대를 넘어 기림리에 있던 집으로 돌아오던 때 아침해가 찬란하게 우리 가족을 비춰 주었습니다. 나는 앞으로 큰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공연한 꿈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 아침이 낮이 되고 또 밤이 되기를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76년의 긴 세월이 흘러, 내 나이는 이제 90이 되었습니다. 세월처럼 무서운 건 없다는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젠 아버님도 가시고 어머님도 가시고 누님도 형님도 다 가시고 여동생 둘과 함께 내가 남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어머니가 젊었을 때가 아들·딸에게 있어서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나는 그 날 아침을 잊지 못합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종심소욕불유구

(從心所慾不踰矩)

☆-공자의 일화,
                    인문학 강의-☆

공자가
천하를 주유할 때
채나라
국경을 지나다가
뽕을 따는
두 여인을 보았는데

동쪽에서 뽕 따는
여인은
얼굴이 구슬처럼 예뻤고,

서쪽에서 뽕 따는
여인은
곰보처럼 얽었다.

공자가
농을 하기를
“동지박 서지박"
(東枝璞 西枝縛) 이로고,

동쪽 가지는
구슬 박이고
서쪽 가지는 얽을 박이라...

서쪽 여인이
공자를
힐끗 보더니
이렇게 대꾸한다.

'건순노치 칠일절양지상
이백어면 천하명문지상'

(乾脣露齒 七日絶糧之相
耳白於面 天下名文之相)

'입술이 바짝 마르고

이빨이 톡 튀어나온게

7일간 굶은 상인데,

귀가 얼굴 색보다
흰걸 보니 문장만은
천하에 알려질 만 하겠군...

공자의 인물 면면을 자세히도 몽타주한 최초 인물 일지도 모르겠는데,

무안을 당한
공자가

서둘러 길을 떠나는데

채나라 국경에서 포졸에게 잡힌다.

천하의 석학
공자를 몰라보는

포졸이 묘한 숙제를 던지는데...

'당신이 노나라 성현 공자라면

보통 사람과
다른 비범함이 있을터,

구멍이 9개 뚫린
구슬들을 명주실로
한번에 꿰어 보라'고 한다.

공자가 명주실을
잡고 구슬을 꿰는데 연나흘을
끙끙 댔지만 실패의 연속이라,

할 수 없이 자신을
乾脣露齒 七日絶糧之相
耳白於面 天下名文之相

'건순노치 칠일절양지상
이백어면 천하명문지상'

이라 했던
여인에게 제자를 보낸다.

제자가 가보니
여인은 간데없고

짚신만이
거꾸로
뽕나무에 걸려 있었던 바,

소식을 접한
공자가
무릎을 탁치며
제자에게 이르되

“계혜촌(繫鞋)을
찾아가 보아라"라고 한다.

제자가
우여곡절 끝에
계혜촌에서
그 여인을
찾아 구슬 꿰는 가르침을 청하자

여인은 말없이
양피지에 글자를 적어 준다.
《밀의사(蜜蟻絲)》

글귀를 받은
공자가
탄복하며 꿀과 실과 개미 한 마리를 잡아오게 하여,

개미 뒷다리에
명주실을 묶어 놓고

구슬구멍에
꿀을 발라 뒀더니

하룻밤 사이
개미가 구슬을 다 꿰어 놓았는지라!

그 날은 공자가
밥 한끼 못 먹고
굶은 지 바로 칠 일째 되는 날 이었다.

옥문을 나서는
공자가
혼자 말을 중얼 거린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인 것을"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참 지식에 통달 되도다.

자신의
오만 방자함과

어리석음을
깊이 뉘우친

공자는 또 다른 의문을 가진다.

왜?
구멍이 다섯도
일곱도 아닌,

아홉개 뚫린
구슬을
나에게 주었을까?

공자는 70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이치를 깨달았 다는데,

인생이란 아홉개의
구멍을 가지고 태어나서

두 눈으로 바로 보고,

두 귀로 바로 듣고,
두 코로 향내를 감지하고,

입으로는
정갈하게 먹고 진실되게 말하며,

두 구멍으로는
배설 하는데
막힘이 없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이 무리없이
삶을 이어가는 기본이요,

하늘의
도리(道理)가 아닐까 하는,

즉, 나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

천하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 이었다.

나이 70에
그 이치를 비로소 통달 하니,

이후
공자는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을 해도
규범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하여

종심소욕 불유구
(從心所欲 不踰矩)라는 것이다.

나이 70은
종심소욕불유구
(從心所慾不踰矩)라 부른다.

나이를
말할 때
공자의
논어, 위정(爲政) 4장을 보면

15세는
학문에 뜻을 둔다하여

"지학(志學)"

20세는
비교적
젊은 나이라하여

"약관(弱冠)"

30세는
뜻을
세우는 나이라하여

"이립(而立)"

40세는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 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라하여

"불혹(不惑)"

50세는
하늘의 뜻을
안다하여

"지천명(知天命)"

60세는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대로
모두 이해한다하여

"이순(耳順)"
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70은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70은
흔히
"고희(古稀)"라고 부르는데,

이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 에서
유래된 말이다.

조정에서 돌아와
하루하루
춘의를 잡혀
(朝回日日典春衣)

매일
강두에서
취하여 돌아오네
(每日江頭盡醉歸)

술 빚이야
가는 곳마다
흔히 있지만
(酒債尋常行處有)

인생
칠십은
고래로 드물도다
(人生七十古來稀)

그러나
논어에서는
70은
"마음이
하고자 하는대로
하더라도
절대
법도를 넘지 않았다"하여

종심소욕불유구
(從心所慾不踰矩)라고 한다.

이를 줄여
나이 70은
"종심(從心)"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