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오늘의 좋은시

[스크랩] [이경림]수선화를 묻다

무봉 김도성 2017. 5. 18. 06:03

수선화를 묻다

 

 
그때, 내가 한 수선화에 세 들었을 때
수선화 노란 가루를 온몸에 쓰고 수선인 척 있을 때
수선화 꽃 색은 얼마나 노란가 듣도 보도 못했을 때

 

그때, 내가 한 水仙에 세 들었을 때
水仙의 낮은 하늘을 나는 제비나비 한 마리에 없는 속을 다 내줄 때
문득 독침 같은 바람이 와 수선화 노란 물기를 다 걷어 가는 줄도 모를 때
수선화, 수선수선 물기 걷히고
녹아내릴 듯 짓무른 목을 가까스로 가누고 있을 때

 

그때, 내가 수선화 노란색에 세 들었을 때
봄 아지랑이 파도치는 허기보다
일곱 살 계집아이가 백발 노파가 되는 일보다 더 노랗게
세 들었을 때

 

수선화, 노란 향기가 뼈마디를 다 녹이고
수선화, 노란색이 수선을 다 지우는 줄도 모를 때

 

수선화 자태는 얼마나 애틋한지

세 살 적 처음 본 냇물처럼
채 도착하지 않은 햇살처럼 애틋해서
내가 그만 늙은 수선 한 잎으로 슬그머니 흘러내리고 싶을 때

 

어느 캄캄한 회음부를 후룩 빠져나온 물이여
꽃물이여

 

거기가 어딘가

 

아득하고 희고 푸르고도 노란, 그러나
北溟보다 검고 희고 완강한 그 어른거림이 과연!

 


詩/이경림

출처 : 오늘의 좋은시
글쓴이 : 이문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