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27. 사진 일기(가을세미나 한국시인협회 폐막식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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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테니스대회 호주 오픈 바브리카 우승 장면 동영상
http://tvpot.daum.net/v/v57e9xRbwbUYsww44RbUpRY
2016. 7. 15. 김용복 이준찬/장대원 박승혜 테니스 경기 동영상
http://tvpot.daum.net/v/v5b08ff7BiwuOBEnjfnmijm
간밤에 눈비가 내려 운동장이 젖었을 것 같다.
아침을 먹고 테니스 코트에 나가 보았다.
운동장이 젖어 집에 오자 마자 옷을 갈아 입고 가을세미나 참석차 선경 도서관에 갔다.
오전 내내 시낭송과 음악을 들으며 진행 사황을 사진에 담았다.
1시경 점심식사후 집으로 왔다.
도착하자마자 사진을 수원 문협에 올렸다.
어금니 치통과 피곤이 몰려 왔다.
오늘 일요일 아내가 무료하게 지낼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아침 7시경 아파트 후문 거리 풍경
장안구청 주차장
아파트 주차장
◆2016/11/27(일) -한국의 위인들(8) 이상재- (3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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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월남 이상재가 친할아버지처럼 느껴집니다. 월남은 1850년에 태어나 1927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내가 태어나던 해에는 77세였으니 나는 그 어른을 뵌 적도 없고 월남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 일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대학생 시절에 나의 친구이던 신영일이 어느 헌 책사에서 1929년에 발간된 구식으로 제본된 <월남 전기> 한 권을 구해서 나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 날부터 이 책을 탐독하였고, 나는 구한국 말과 일제시대를 통해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그를 모시게 되었고 매일 마음속에 모시고 살게 되니 이 어른이 나의 친할아버지처럼 느끼게 된 것입니다. 나는 월남의 그림자라도 보이는 모임에는 기를 쓰고 참석하였고, 충청도 한산에 있는 ‘월남의 집’에도 여러 번 가 보았고, 그의 동상이 종묘 앞 공원에 건립되었을 때에도 가서 축사 한 마디를 하였습니다. 강연을 하면서 월남에 언급한 일도 수천 번은 될 것입니다. 한전의 사장을 지낸 손자 이홍직 선배가 서대문 녹번동에 살고 있었는데 ‘월남 이상재 전기’를 쓸 생각이 있어서 그 선배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 손자가 배재학당을 졸업하던 날 졸업식에 참석한 월남이 축사에 앞서 던진 해학적 한 마디를 기억하고 있는 나는 이 선배에게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선생님은 할아버님(월남)을 모시고 함께 보낸 시간도 적지 않으셨을 텐데 그 할아버님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선배께서 곧 답을 주었습니다. “우리 할아버님은 매사에 태연하신 분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내 무릎을 쳤습니다. “그렇지요. 자연스러운 분이셨지요. 그래서 언제나 태연하셨지요.” 위대한 사람은 무슨 일이 생겨도 태연하고 자연스러운 사람입니다. “쥐 한 마리 때문에 태산이 요란하게 굴어서야 되겠냐”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가 이토록 혼란한 것은 월남 같은 지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월남은 자기보다 아홉 살 위인 판서 박정양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박 판서가 주미공사(미국 특파 전권대사)로 임명된 것은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5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이상재는 서기관 자격으로 박 공사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1882년 미국의 해군 제독 R. W. Schufeldt가 청나라 이홍장의 반대를 물리치고 조선의 문호 개방에 성공해서 공사 일행이 미국에 갈 수 있었습니다. 월남이 끼어 있던 공사 일행은 칭찬 받을 만한 일을 많이 하고 돌아와 고종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으나 청나라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하는 수 없이 공사 박정양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월남은 부름을 받아 대궐에 들어가 고종 앞에 부복하였을 때 고종은 “이번에 수고가 많았어. 이 기회에 벼슬을 한 자리 하지”라고 하였습니다. 충신 이상재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모시고 갔던 어른은 옥중에 있는데 모시고 갔던 놈이 벼슬을 할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감탄한 고종이 “그럼 아들을?”라고 했을 때 월남은 “제 아들놈이 무식해서 벼슬이 가당치 않사옵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렇게 사양하고 어전을 물러나는 이상재를 보내며 고종이 입속말처럼 “저런 신하만 있으면 나라가 되겠는데”라고 하였답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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