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물성무
개물성무
동양철학의 전통에 따르면 세계의 궁극원리를 다루는 본체론과 가치론은 일관된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모두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우주는 그 자체 내에 물질세계와 정신세계가 다같이 포괄되어 있어 양자가 한 덩어리로 혼연일체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모순관계로서의 대립적인 두 영역으로 2분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우주는 단순히 시간·공간으로 나열된 기계적 체계가 아니다. 즉 우주는 폐쇄된 체계가 아니라 영원히 자기를 스스로 창조해가는 개방된 세계이므로 그것은 근본적으로 가치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주역〉에서는 언제나 가치론적 용어로 우주의 질서를 설명했기 때문에 〈주역〉의 우주론은 가치중심적 철학이라고 규정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계사전의 설명방식에 의하면 하늘의 원초적인 힘인 건원에서 만물이 비롯되며(萬物資始), 땅의 생산하는 모체인 곤원에서 만물이 생육된다(萬物資生).
생명을 낳고 낳는 모든 변화의 과정인 역은 하늘의 본질이고, 도(道)의 과정이며 인간행위의 준칙이므로, 지선의 덕으로만 천지의 광대함과 짝을 같이할 수 있다. 이때 하늘의 창조적 작용을 의미하는 건(乾)의 이치는 사람이 알기 쉽고, 땅의 생산적 작용을 의미하는 곤(坤)의 이치는 간단하다. 쉽고 간단하기 때문에 천하의 모든 원리를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 천지가 자기 자리를 설정하니 역의 변화가 그 가운데서 진행된다.
역이 비록 64괘 384효로 되어 있으나 역은 존재하는 모든 도를 포괄한다. 그래서 계사전은 이를 "역은 천지와 더불어 준한다. 그리하여 천지의 도를 미륜(彌綸)한다"고 표현한다. 천지와 더불어 준한다는 것은 같다는 뜻이고, 천지의 도를 미륜한다 함은 천지의 도를 보편적으로 포괄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계사전은 역의 본래 목적에 관하여 "대저 역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역은 개물성무하고 창천하지도한다. 이와 같을 뿐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송대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희(朱熹)는 〈주역〉은 본질적으로 복서의 책이라 하면서 '개물성무'도 복서에 의해 길흉을 나타냄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길흉을 알게 하여 알지 못하는 것을 계발시키고, 또 사람이 어떤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면 완성시킨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계사전이 공자의 저작이고, 또 공자 자신은 평소 점을 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이 명제는 '역은 만물의 뜻을 개통하고, 천하의 사업(事業)을 성취시킨다. 그 도는 온 천하를 뒤덮고도 남는다'라고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천하의 도와 천지의 도를 구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자는 모든 사물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도로서 군도·신도·부부지도가 여기에 해당된다. 후자는 모든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하는 원리, 즉 모든 존재자의 궁극적 근거인 보편적 도이다. 다시 말해서 구체적 개체사물은 천차만별로 존재하지만, 도 그 자체는 자기 원인적 존재로 형이하의 세계와 구분되는 형이상학적 존재이다. 따라서 역의 근본의도가 천지지도의 이법을 근거로 인간사회에서 마땅히 행할 준칙을 해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할 때 역은 무엇보다도 먼저 천지를 원리적 측면에서 해석하고, 거기에서 당위문제인 가치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