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써야 시가 되느니라.” 책에서
“시를 써야 시가 되느니라.” 책에서
시어는 표어가 아니다
'존재'니 '낭만'이니 '향수'니 '고독'이니 '정글'이니 '가교'니 하는 따위의 유행어 속에서만 시인 행세를 하려는 사람들도 딱한 일이지만, '해변의 낭만'이니 '오후의 향수'니 '심야의 정글'이니 '의지의 승강기'니 무어니 무어니 한자어 단어 몇 개씩 붙여 급조한 숙어들을 가지고 시를 해내고 있는 사람들도 너무 게을러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시를 작파하고 신문이나 잡지사에 취직해서 그걸로 타이틀을 만들어 붙이는 편집부 기자가 되든지, 좀 더 이런 걸 잘 만들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주 그 광고가 보이는 각종 표어 모집에 응모하면 적격일 것이다.
붉은 수수밭/ 안명옥
아침마다 팬티 하나를 더 가지고 다닌 적 있었다
등 떠밀어대는 바람의 손에
밀물로 들어선 지하철 안
비릿한 바다냄새가 출렁거리고 팔 하나와 가방은
어느 아주머니 가슴 위에 수평선으로 걸려 있고
사람과 사람이 침몰 직전의 배들처럼 흔들리는 시간
청바지를 입은 은밀한 부위에
어느 날은 두툼한 물고기가 다가와 살래살래 문지르다 가고
어떤 날은 배 한 척이 노를 저어와 비벼댔다
뒤를 돌아보면
점잖은 물고기의 표정들
몸 비틀어 저항하는 눈으로 쏘아봐도 달라지지 않았다
늦더라도 버스를 탈걸.
여러 번 갈아타더라도 버스를 탈걸.
치욕의 침이 입안에 흥건하게 고였다
먹은 것 없는 아침이 자꾸 헛구역질을 할 때
몸은 붉은 수수밭을 지나온 듯
젖어버렸다
개봉에서 종로3가까지 내내
어이없는
망각된 몸의 멍한 반응
그런 날은
회사 출근 도장 찍기 전에 화장실에서 젖은 팬티를
갈아입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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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은 표현의 절박성에서 탄생한 언어가 아니라 어디서 따온 듯한 "급조한 숙어"를 혐오하고 있다. 언뜻 보면 제법 멋진 표현인 것 같으나 이미 유형화된 '문사 文辭' 의 공허함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미당이 '표어'라는 말을 통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유형화된 수사를 시로 착각하고 있는 이들의 천박한 시 정신이다. 게으른 시인은 자신의 말이 아닌 적당히 멋있는 말을 짜깁기해 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는 어떤 관념이나 주장을 추상적으로 편집하고 박제한 '표어' 가 아니라, 영혼의 맨살에 닿을 듯한 강렬한 체험의 언어라야 한다.
안명옥의 '붉은 수수밭'은 여성이라면 한 번쯤은 겪어봤음 직한 전철 안의 성추행 경험과 피해자가 느끼는 치욕감을 '붉은 수수밭'을 지나온 여인의 심경에 비유하고 있다. 이 시에서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어이없는 망강된, 몸의 멍한 반응"이다. 정신은 치욕을 느끼건만 몸은 그 치욕의 기억을 일상처럼 갈아입는다. "회사 출근 도장 찍기 전에 화장실에서 젖은 팬티를/ 갈아입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진술은 정말로 아찔하다.
이 시가 적당히 성추행을 제재로 삼은 '표어' 적인 시였다면 성추행에 대한 지탄이나 상투적인 비난의 표현을 나열하는데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침몰 직전의 배들처럼 흔들리는 시간" 자신의 몸을 부비다 간 치욕의 흔적들을 "물고기" "노" 등의 서정적인 어휘로 표현하고 있다. 성추행자에 대한 분노를 경직된 표현으로 드러내기보다, 터무니없이 부조리한 상황에 "끼여" 부대끼고 있는 화자의 낭패함을 해학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성추행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시를 써야 시가 되느니라" - 예옥 刊/ 서정주 作/ 방민호 박현수 허혜정 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