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 예술인 총회 워크숍 설악산에 다녀 오다 원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원 주고 산시계
만원짜리 시계를 손에 들고
글 / 무 봉
2016. 4. 29. - 4. 30. 1박 2일 수원 예총 주관으로 설악산에 워크숍에 다녀 왔다.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원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원짜리 한 장 주고 시계를 샀다.
얼마전에 집앞 금은 방에서 잊어버려도 서운하지 않은 싸구려 시계 하나 5만원 주고 산 시계가
눈금이 자주 떨어져 네 번째 AS를 부탁한 상태라 만원 주고 싸구려 시계를 하나 샀다.
중국산인지 국산인지 알 수 없으나 시계 뒷면에 녹이 슬지 않는 스테인레스에 방수까지 된다고 쓰여 있다.
얼마를 쓰다가 버리게 될 것인지 모르지만 너무나 싸기에 하나 구입했다.
현재까지 시계가 멈추지 않고 시간도 정확하게 맞는다.
시계 만원짜리를 들고 나는 50여 년전 총각교사 기숙사 남자 사감 시절 시계 도난사건이 생각났다.
내 나이 25세 총각교사로 교직에 첫발을 디뎠다. 대전 변두리 공동묘지 터를 닦아 세운 신설 중학교였다. 기독교 학교로 전국각지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절반이었다. 그래 봐야 교직원이 13명 전교생이 120여명 밖에 안 되었다. 나는 수학과 과학과목을 담당하며 기숙사 남자 사감이었다. 학교는 산속에 위치한 신설 된지 얼마 안 된 학교였다. 학급당 40명으로 남여 반반 혼합 반 편성 해 운영했다. 만학을 한 학생들이 많아 17,8세로 교사인 나와 10년차도 안 되었다. 6.25 전쟁 당시 미군을 학살 처형 매장한 곳이라 유골이 많았다. 발목부터 무릎까지의 뼈의 길이가 길어 미군들의 유골임을 알 수 있었다. 간혹 파란 약병에 편지를 써 넣어 유골과 함께 나온 유서가 발견되었다. 영문으로 된 유서의 내용에는 이곳은 미군의 무덤이며 소속부대와 사망 병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이런 병들이 여러 개 발견 되었지만 반공시간에 선생님들이 교육 자료로 활용했을 뿐
경찰서에 신고하는 것을 몰랐다. 미국의 유족들이 찾는 중요한 단서가 되지 않았을까 가끔 아쉬운 생각을 해 보았다. 한 여름에는 주변 산에서 내려온 뱀 때문에 교실이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교사 중에 도시락에 뱀이나 개구리를 넣어 부인이 놀라 실신 한 적도 있다. 뱀의 머리를 엄지와 검지로 가려잡고 꼬리를 셔츠 소매에 넣어 악수를 청해 놀란 동료교사들이 많았다.
지금은 모교단의 유명한 은퇴 목사님이다.
“ㄱ”자 모양의 한옥 개와 기숙사 건물로 맨 첫 방을 여 사감이 사용하고 끝 방을 남자 사감인 내가 사용했다. 여 사감도 처녀, 타관 객지로 하숙할 형편이기에 나와 함께 사감을 했다. 1965년 7월 여름 방학 며칠 앞두고 여 사감 시계 도난 사건이 일어났다. 주말로 대부분의 기숙사생들이 집에 다니러 갔었다. 남녀가 함께 사용하는 세면대 앞에 놓아둔 여 사감 시계가 없어 진 것이다. 지금은 시계가 흔해 사은품으로 얻어 차지만 당시만 해도 비싸고 귀했다. 기숙사에 남은 학생은 남학생이 둘 여학생이 셋이었다. 분명이 다섯 학생 중에 범인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여선생이 말렸지만 기독교 학교로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다는 편견 때문에 학생들을 모아 놓고 훈계했다. 나는 지금도 그 시계사건 때문에 가슴이 무겁고 후회를 많이 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사람은 누구나 순간적으로 시계가 탐이나 실수를 할 수 있다. 내일 월요일 아침까지 선생님이 잘 볼 수 있는 교무실 책상 서랍이나 교탁에 놓으면 용서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다행이 월요일 출근해 서랍을 열어 보니 시계가 있었다. 용기 있는 학생이 고마웠다. 그런데 시계를 싼 종이가 필기한 생물노트를 찢은 종이다. 호기심에 필적을 감정해 보니 A와 B 두남학생 중 B군의 노트였다. 전교생 중 18세로 나이가 제일 많은 2학년 학생 A군의 소행으로 의심했었다. 시계를 갖다 놓은 것은 기특했으나 같은 반 친구 B군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 미웠다. 나는 더 이상 물을 것도 없이 당일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 저녁식사 후에 뒤편 공동묘지로 A학생을 불러 엉덩이에 매질을 했다. “나쁜 놈! 잘못은 네가 하고 나이어린 동생 같은 친구에게 생물 노트를 찢어 누명을 씌워. 바른대로 말해 이놈아! “ 무릎을 꿇고 엉엉 울며 용서를 빌었다. 나와 일곱 살 차이 고향에서 공부하는 막내 동생이 생각이 났다. “네 잘못을 아느냐?” “예! 선생님.”
“선생님이 왜 화가 났다고 생각하느냐?” “친구에게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됐다. 용서 하마!” 끌어안고 등을 어루만지며 나는 울며 용서를 했다.
그런데 시계 도난 사건 소문이 학교에 퍼져 학생들 입을 통해 학부모 항의 전화가 빗발 쳤다. 결국 학생부에서 징계 위원회가 열려 퇴학처리하기로 처벌이 내렸다.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으나 신출 총각선생인 나는 소용이 없었다. 내가 그때 사표를 쓰고 학교를 떠났어야 했다. 나는 용서를 빈 학생과의 약속을 지켜 주지 못했다. 그 학생은 금산 추부면 학생인데 나이도 많아 집에 가서 아버지 농사일을 돕겠다고 했다. 이 때 나는 기독교 학교와 종교에 대한 懷疑(회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65년 11월 결혼하고 신혼 생활로 마음잡고 지내다 보니 두 딸을 낳아 5년을 지냈다.
5년 후 1970년 사표를 내고 서울로 학교를 옮겼다. 1974년 겨울 육남매 중 맨 위 한분 누님이 대전 박 외과 병원에서 위암 수술로 입원했었다. 누님 병문안 차 대전에 내려갔었다. 병원 응급실 의자에 앉아 있는데 젊은 청년이 선생님 하면서 인사를 했다. 낯이 익어 자세히 보니 A학생 김 군이었다. 반가우면서도 죄인처럼 두려웠다. “작년에 선생님을 찾아뵈러 학교에 갔는데 그만 두셨다고 하더군요.” “몰라보게 장성한 청년이 되었군. 그래 자네는 어떻게 지내나.” “”예! 선생님 덕에 잘 살고 있습니다."
내게는 원망서린 말 같아 괴로웠다. “그동안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식사나 함께 하며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행색은 기름 묻은 작업복 차림에 얼굴이 많이 그을렸으나 예의범절이 깍듯했다. 고급 한식식당으로 안내 했다. 근사하게 차린 주안상이 들어 왔다. 시중드는 아가씨들 모두 나가라 했다. 김 군은 먼저 내게 큰 절을 올렸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나는 맞절로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잔을 올렸다. “첫잔은 감사의 잔이고 둘째 잔은 강령의 잔입니다.” 그 다음에 내가 주는 잔을 모로 앉아 마셨다. “가만있자 자네가 지금 스물일곱 아닌가?”
“예! 맞습니다.” “결혼은 했나?”
“아직 총각입니다.” “그동안 나를 원망 많이 했지. 하고 싶은 원망 모두 받겠네.” “선생님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오히려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중2 때 학교를 그만 둘 때가 18세었습니다.” “반년동안 농사일 돕다가 그 이듬해 트럭운전수가 되기 위해 트럭 조수로 일했습니다.” “2년 후 21세 때 운전 면허증을 땄습니다.” “운전기사로 취직하여 월급을 꼬박꼬박 저축했습니다.” 나는 A군의 이야기에 빠져 담배를 꺼냈다.
A군이 불을 붙였다. 흥미와 긴장된 마음속에 한 모금 길게 담배를 빨아 뱉었다.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트럭 한대 구입하는 것이 소원 이었습니다.” “저축한 돈과 빚을 내어 트럭 구입했습니다.” “내차로 건축현장에 자갈 모래를 운반해 쏠쏠하게 돈을 벌었습니다.” “바로 밑에 동생도 운전면허를 따게 해 함께 열심히 일했습니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 트럭이 3대를 굴렸습니다.” “제대 후 지금은 12대 트럭을 운행하는 **운수회사 사장이 되었습니다.” “운전기사가 사고를 내어 피해자 가족과 환자 면회 차 병원에 왔다가 우연히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학교에서 용서를 해주었다면 제가 오늘 이렇게 돈을 벌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래도 공부를 못한 것이 평생 한이 될 터이니 검정고시 준비 하여 고등학교는 마치도록 하게나.” “대학은 나중에 늦게 시작해도 되니 명심하게나.” “예! 선생님 명심하겠습니다.” 장시간 이야기로 주고받은 술이 과했는지 취기가 올랐다.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그 후 전화 연락을 가끔 했는데, 1976년 수원으로 학교를 옮기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그 후 교장으로 있으면서 퇴학 결재만은 몇 번이고 보류했다. 지금도 그 학생의 퇴학을 막지 못한 나의 나약함에 모진 질책을 해 본다.
1960년댸 시계값과 지금의 시계 값의 차이가 얼마인지 모르지만 50여 년전에 시계 사건을 돌아 보며
용서보다 더 위대한 사랑이 없음을 다시 돌아 본다.
2016. 5. 9.
앞으로 있을 제52회 스승의 날(5월 15일)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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