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사진 일기

2019. 5. 15. 사진 일기(수원시 이순테니스 대회)

무봉 김도성 2019. 5. 15.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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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경기 수원시 장안구(현재접속지역) 읍·면

간밤 늦게 11시경 성남에 회사 일을 마치고 큰 딸이 왔다.

언뜻 오랫만에 보기에 몸이 좀 마른듯해 일이 힘든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어깨 토증 때문에 염증을 치료하는 주사를 맞은 것이 신기하게 효과가 있다.

어깨가 많이 부드러워 졌는데 오는 수원시 이순 테니스 대회에 출전을 고민하게 된다.

아예 며칠 휴식하며 치료에 전염 해야 할까 고민이다.


이른 아침 밥을 아내에게 차려 주고 테니스 코트에 나갔다.

젊은 회원들 속에 어울려 타이트하게 경기를 해 이겼다.

9시경 만석공원 테니스 코트에 갔다.

경기를 하지 않고 관전만 하려 했으나 또 욕심이 발동하야 4셑트 경기를 했다.

오늘 늘 경기는 성과도 입상도 못했다.

후회가 되었다 공연히 무리한것이 후회가 되었다.

오후 4시경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정형외과에 들려 주사맞고 찜질 하고 왔다.

완치가 되려면 꽤 여러날 걸려야 할 것 같다.





















2019/05/15(수) 김옥균의 꿈 (380)

 

김옥균의 꿈

김옥균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보았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에도 그는 박영효 일행의 고문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활약한 적도 있었다.


김옥균은 명치유신을 격은 일본이 서구화를 목표로 엄청난 발전을 거듭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우리나라에도 명치유신과 같은 개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들의 형편은 어떠했던가? 척신들이 정권을 휘어잡고 있었고, 그들의 머릿속에는 사대주의 사상이 꽉 차있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 적폐를 청산하기 위하여 그는 박영효 등과 손잡고 독립당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국정의 개혁은 정당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임을 김옥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정변이 필요함을 절감하였다. 때마침 우정국의 개업 축하 모임이 188412월에 있음을 알고 거사를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갑신정변이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대가 나서서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고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와타 슈사쿠라는 일본 이름을 가지고 그 후 10년 동안 일본에서 살면서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나 이홍장을 설득하기 위하여 중국에 갔다가 동화양행에서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어 처참하게 그 큰 꿈을 잃고 말았다.


상해에 가서 그 동화양행 앞을 지나면서 가슴이 뭉클하였다. 어쩌면 이렇게도 일이 안되는 나라에 우리는 태어났는가.

 

김동길


Kimdonggill.com



 

 

 

 

 

애기 똥 풀

 

김도성

 

담장 밑 수줍게

장항아리 옹기종기


발목잡고 엉덩이 들면

노랗게 핀 아가 똥


만져도

냄새 안 나는

귀여운 아가 똥